이사(李斯)
상태바
이사(李斯)
  • 한북신문
  • 승인 2021.10.03 06: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중국의 광대한 역사를 이해하는 몇 가지 대립코드가 있다. <분열과 통합>.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정권교체>,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의 갈등> <전제왕권과 농민 기의(起義)> 등이다.

지역이 넓고, 민족과 언어가 다르고, 문화와 풍습이 다르다는 갈등의 요인들이 중국의 긴 역사를 이끌어 온 변인(變因)들이었다. 최초로 이 다양한 가치의 대립을 종결하고 중국 문화의 원형을 만들어 낸 인물이 바로 진시황이었다. 그는 전국(戰國)의 극심한 갈등을 정치적으로 통합했을 뿐 아니라 제도와 사상, 문물, 교통, 산업 전반에 걸쳐 중화문명의 전형(典型)을 제시하였다. 그를 중국의 진정한 창시자로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업적의 바탕에 재상 이사(李斯)가 있었다. 그는 법가사상을 진(秦)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확립하여 이를 구현함으로써 진이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의 기초를 놓은 명재상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이렇게 진술한다. “소신은 전성을 다하여 법령을 집행했습니다,

한(韓)나라를 위협하고 위(魏)나라를 약화시키고 연(燕)나라와 조(趙)나라를 격파하고 제(齊)나라와 초(楚)나라를 평정해 그 왕들을 포로로 하였습니다. 북의 야만족과 남의 백월(百越)을 평정하였습니다. 대신(大臣)을 존경하고 그의 작위를 높여줌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사직(社稷)을 모시고 종묘(宗廟)를 정비해 군왕의 어진 덕을 나라 안에 과시하였습니다.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고 문물제도를 천하에 고루 미치게 하여 진나라의 이름을 불후의 것으로 다져 놓았습니다.

길을 정비하고 황제가 나라 안에 돌아다님과 유람을 성대하게 갖추어 주군이 건재하심을 천하에 떨치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형벌을 부드럽게 하고 과세를 가볍게 하여 민심의 파악에 힘썼으며 만민이 황제를 우러러 모시게 하여 죽을 때까지 은덕을 잊지 않게 하였습니다.” 과연 천하통일의 주역으로서 그는 자신의 신념과 역할에 충실하였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곡과 탄식 속에 죽어가야 했던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분서갱유」 법가 유일사상을 거부하는 지식인들을 묻어죽이고 법가 이외의 모든 서책을 불태워버린 사건이었다. 자신의 이념에 충실하고자 그는 생각이 다른 모든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여 말살하고자 하였다.

진시황이 죽고 2세 황제 호해(胡亥)가 즉위하면서 그는 악정의 책임자가 되어 「요참(腰斬)」에 처해진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내린 극형은 따로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어진 선비를 묻어 죽이고 그 귀중한 서책을 불태운 악인이라는 역사의 낙인이 찍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력을 잡은 자가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사(李斯)의 비극이고 권력의 비극이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