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을 거두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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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을 거두어 주소서”
  • 한북신문
  • 승인 2021.04.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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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1611년 광해 3년 3월7일 문과의 최종시험인 전시(展試)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합격자들이 선정되어 그들이 작성한 답안지, 시권(試卷)이 임금에게 전달되었고 이를 읽은 광해는 한 시권에서 그만 분노하고 말았다.

○… “내가 응시자 임숙영(任叔英)의 응제문을 보니 그 답이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별도로 제목을 벗어나 방자하고 거리낌없이 패악한 말을 하였다. 그런데 또 시관이 합격시켰으니 숙영의 임금이 된 자는 너무도 괴롭지 않겠는가. 그가 만약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상소를 하여 극구 말하였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과거장에서 감히 제목을 벗어나 글을 지어 온갖 말로 비방하였다. 만약 이 글을 합격시킨다면 말세의 경박한 무리들이 반드시 앞을 다투어 군상을 욕하는 글을 미리 지어서 시관의 눈을 현혹하여 합격하는 수단으로 삼을 것이니 그 폐단은 앞으로 바로잡기 어려울 것이다. 임숙영을 방목에서 삭제하도록 하라. <실록 광해3년 3월17일>

임숙영은 당연히 자신이 작성한 시권을 임금이 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임금에게 까닭 없이 존호를 올리려는 신하들을 간신배라 욕하고 이를 묵인하는 임금을 아울러 싸잡아 비난하였다. 이를 기개있는 신하의 태도라 여긴 좌의정 심희수가 낮은 등수이지만 임숙영을 합격자로 선정한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조정은 임숙영의 과거합격을 취소하라는 임금과 명령을 거두어 달라는 대간의 상소와 절대 들어줄 수 없다는 임금 광해 사이에 3달에 걸치는 치열한 간쟁에 휩싸이게 된다. 심희수는 파직되었고 이 사태를 비웃는 시를 지은 권필은 결국 죽음을 맞기까지 하였지만 대간의 상소는 멈출 줄을 몰랐다.

언론을 막으면 정치 자체가 쇠퇴하니 비록 과거 응시자의 시권에 심한 일탈의 면모가 있어도 임금은 이를 용납하여야 한다는 것이 대간의 입장이었다.

3월18일부터 시작된 항의 상소는 사간원이 9회, 사헌부가 10회, 홍문관이 20회, 양사의 합계가 36회, 삼의 합계가 3회. 예조에서 1회 진행되었고, 개인적으로 올린 차자(箚子)도 부교리 이준, 좌의정 이항복, 동지돈녕부사 김헌성, 유생 유백증이 각 1회, 거기에다 부원군들의 합계가 1회, 원임대신들의 합계 1회로 총 85회에 이르렀고 광해 역시 뜻을 굽히지 않았다. 6월10일 사태를 보다 못한 국가 원로 이항복과 이덕형이 임금을 만나 해결을 호소하고 나서야 앞으로는 유사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법을 만든다는 조건으로 겨우 합격을 인정한다는 교지를 받아내게 되고 7월18일에 가서야 비로서 합격자 명단이 공식으로 방방(放榜)되었다.

조선시대는 절대 권력자 왕이 다스리는 시대였다. 그의 뜻이 곧 법이요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 절대 권력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있었다. 신하들은 물론 아직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성균관 학생이나 지방 촌락의 유생들에게 조차 임금의 정책과 지시에 당당히 “아니 되옵니다”라고 이론을 제기할 수 있는 상소의 권한이 있었고 임금은 그들이 올린 상소문에 일일이 비답(批答)을 내려야 했다. 실상 임금의 하루 대부분은 이 상소를 읽고 비답을 내리는 일에 소모되는 지경이었다.

어느 여당 정치인이 대통령을 존칭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지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듣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어쩌면 우리는 폭군이라 불리는 광해군의 시대보다 못한 정치 후진사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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