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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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100년
  • 한북신문
  • 승인 2020.09.1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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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이 비극적인 사건은 1921년 6월28일에 일어났으니 내년이면 꼭 백년이 된다.

국체를 보존할 방도가 없다는 엄록한 사실을 깨달은 신민회(新民會)가 만주 일대에 국권회복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하자 경기 일대의 거대한 농장을 급히 정리한 이회영(李會榮) 등 한산 이씨 6형제와 임청각(臨淸閣)과 부속 토지를 정리한 이동녕(李東寧) 등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 三源堡 鄒家街)를 거쳐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웠고 이 학교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지청천(池靑天) 등 유수한 한인 장교들이 합류하면서 만주 독립항쟁의 주요 간부들을 양성했고 이들은 후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비롯한 만주지역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국민부(國民府) 등의 주요 지휘관으로 헌신하였다.

이처럼 잘 양성된 독립무력이 이룩해 낸 혁혁한 전과가 바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이었다. 광복을 쟁취하고자 하는 열혈 투사들의 단련된 의지는 수천 명의 왜적을 도륙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19년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신민회, 대한국민회, 혼춘대한국민회(琿春大韓國民會),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의군부(義軍府), 혈성단(血誠團), 야단(野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의 10개 독립군단체를 망라한 3개 여단 규모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무력항쟁의 기틀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하자 이에 따른 대규모의 보급이 문제가 되었고 아울러 일제는 이들 독립군단과 재만 동포의 연결을 끊고자 1920년 만주의 우리 동포를 무차별 학살하는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우리 독립군단은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특히 군수지원이 절실히 필요하였는데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던 러시아 혁명 적군을 믿고 김좌진 등의 반대를 무릎 쓰고 흑룡강주 밀산에서 겨울을 나고는 러시아-만주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향했다.

그러나 적군은 이들 한인 독립군을 자신들이 붉은 혁명 무력에 편입시킬 목적으로 이동과 주둔을 제의하였을 뿐 독립군을 지원할 의사는 전혀 없었고 마침내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는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하는 독립군을 기관총, 장갑차, 대포를 이용해 공격하였고 독립군은 270여 명이 사살되고 31명이 익사, 250명은 행방불명이 됐고 970명은 포로가 되어 볼셰비키 혁명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적군은 만주에서 재기를 꿈꾸던 김좌진마저 살해하여 마침내 우리의 만주 독립군을 궤멸시키고 만다.

2020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광복회장은 만주의 독립군을 토벌하던 친일인사가 국립현충원에 묻혀있고 친일파가 만든 애국가를 부른다며 목청껏 친일세력 혁파를 부르짖었다. 그들의 공과는 마땅히 역사가 평가하고 민족이 포폄(옳고 그름이나 착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 조선시대 관리의 근무성적 평가제도)하리라만은 왜곡된 가치관에 몰입된 한쪽 눈만의 시각은 더 큰 문제이다.

똑똑히 기억하자! 백 년 전 1921년 6월28일 우리 만주 독립군의 허리를 끊고 그 존재를 샅샅이 쓸어버린 것은 바로 붉은 좌파 오하묵이 앞장 선 붉은 군대였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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