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국수
상태바
부흥국수
  • 관리자
  • 승인 2019.09.27 0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1950년대, 정확히 말하면 1955년 아버지는 당시 의정부장로교회(지금의 의정부제일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던 숙부님의 알림으로 서울에서 의정부로 이사 오셨고 당시는 노천 야시장이었던 지금의 의정부제일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셨다.
당시의 의정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이북 피난민들과 의정부에 주둔하는 미군부대에서 노무자로 일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외지인들의 도시였다. 전쟁 전에는 수도 북방의 중요한 방어거점이면서 포천과 양주, 파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형성된 작은 마을에 불과했으나 전쟁을 거치면서 외국군인 이 대규모로 주둔하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외지인들이 모여 들면서 급격한 도시팽창이 이루어져 1963년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될 당시에는 수원시, 인천시와 함께 경기도의 3대 시()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여전히 시의 주변에서는 전통 농업이 이루어지고 여기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거래하는 5일장으로 서기도 하였으나 1950년대부터 이미 의정부는 미군부대에서 불법, 합법으로 흘러나온 각종 군수물자를 거래하는 거대한 외화물류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었다.
의정부로 내려 온 우리 식구가 처음 정착한 곳은 지금 O산부인과가 자리 잡고 있는 곳, 길 건너 너른 공터를 공유하는 한 주택이었다. 공터를 공유했다는 것은 그 공터 주위에 여러 주택들이 공터를 둘러싼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뜻인데 이는 그 공터에 공용 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국수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5-60년대의 의정부는 외국군 기지를 중심으로 기회가 혼재하는 땅이었다. 여건을 활용하여 큰 돈을 버는 이들이 있는 반면 하루하루의 생계가 벅찬 더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 가난한 이들에게 싼 값으로 먹거리를 제공하던 국수는 비록 맛없고 질리기는 했어도 고마운 위안이며 혜택이기도 했었다.

그저 간장 탄 물에 말거나 김치 국물에 담그거나, 그도 아니면 간장과 기름, 설탕을 섞어 비벼냈어도 한 때의 끼니를 그것도 식구들이 모여앉아 도란거리며 나누는 고마운 음식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그 춥던 겨울 동치미국물에 말아 이를 부딪히며 먹던 어머니의 국수, 그 그리운 맛을!
그때 나 어릴 적 내가 살던 그 공터에서 가득히 널어 말리던 그 눈부신 흰색의 국수가 아직도 힘겨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부흥국수다. 생각하면 고맙고 생각하면 눈물겨운 이유는 아마도 그 오랜 세원을 힘겨이 견디고 살아남아 준 부흥국수의 존재 그 자체일 것이다.
무엇이 이 국수를 지금까지 여기에 있게 했을까? 여전히 어머니가 말아주시던 옛 국수의 맹한 맛이 그립고 더러는 아직도 배가 고픈 서민들의 한끼 벗이 돼주는 그 넉넉한 혜택 때문은 아닐까?
이제는 머리 희어지고 눈 희미해진 꾀복쟁이 옛 친구들을 불러모아 오늘 저녁 부흥국수 한그릇 먹고 싶다. 함께 늙어가는 음식, 그 음식을 일러 <소울푸드>, 영혼의 음식이라 하지 않던가!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