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선 우키시마마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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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선 우키시마마루호
  • 관리자
  • 승인 2015.09.0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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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정 발행인

올해 광복절은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은 지 70년 되는 해이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15일 일왕이 무조건 항복하게 이르렀다. 일본 본토의 맨 북쪽 끝 오미나토항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들 조선인들은 약탈도 하지 않았고 오직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이들은 탄광 막장에서 허리도 못 펴고 용변도 참아가며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여차하면 매를 맞고 총살당하기도 했다. 그들의 돌 낙서에는 ‘배가 고파요. 어머니, 고향에 가고 싶어요’라고 적혀 있다. 벤또(도시락) 한 귀퉁이에만 밥이 있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밤마다 아프다 핑계 대고 바닷가에 나가 미역을 뜯어 먹고 살았다는 증인도 있다.

우키시마마루호는 1945년 8/18일부터 인근 조선인을 전부 태우고 8/22일 날 오미나토항으로부터 부산항을 향해 출발했다. 8/24일 저녁6시 조금 전 ‘쾅’ 소리 2번과 함께 배가 순식간에 둘로 갈라져 30~40분 동안 서서히 가라앉았다고 한다. 日本 정부는 기뢰에 의한 폭발로 549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는데, 신문에 단 한 줄도 안 나오다 한 달반 후에 일본신문에 짧게 나왔다.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은 1995년 ‘아시안블루’(이토우마사이지 제작)란 영화로 제작되었다. 침몰원인은 기뢰냐 내부폭발이냐는 철판의 방향으로 판별 가능하고, 기뢰 2방이면 두 동강 난 배가 가라앉는데 30분 이상 걸릴 수가 없다.

일본 정부는 배 절반은 5년 후인 50년에 나머지 절반은 8년후인 53년에 인양했는데 ‘원형보존’인양 요구는 무시하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였고, 바닥에서 들어 올리지 않고 크레인으로 위만 잡아 올림으로써 내부 유골이 모두 아래로 떨어지게 돼 유골인양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건진 유골은 화장 후 한데 섞은 후(합장) 다시 나누어 분골해 구분이 안 가게 하였다. 도쿄 우천사에 275위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한국으로 가면 안 된다고 한다.

4734톤의 배를 군함으로 개조해 정원 851명을 4000명으로 늘린 우키시마마루호는 출발 3일 전부터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을 태워 약 8천5백 명이 탑승 후 7000명이 죽고 약1500명이 살아서 돌아온 세계 해난사고에서 유일무이(타이타닉호 2200여 명 사망) 한 대학살이었다.

말로만 내선일체였지, 사람이 아닌 동물로 취급하고 부려먹고 쓸모없어지면 죽이고 버리는 행위를 서슴없이 행한 게 일제의 만행이었다. 마이즈루 시민들은 매년 추모대회를 열어 희생 영혼들을 추모(추모회장:요헤 가즈히코)해 오고 있다.

민간시민들은 올바른 양심으로 있는데, 日정부는 아베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과와 진상조사를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 선원 25인의 그 날의 생사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히틀러의 만행에 동참한 전범을 끝까지 추적해 재판장에 세우는 ‘시몬비젠탈’센터처럼 우리도 끝까지 추적하는 ‘조선인 강제동원 진상연구소’를 만들어 인류 역사상 가장 혹독하고 대량살상이 이뤄진 2차 세계대전과 그중 가장 인권을 유린한 일본군의 조선인 강제동원과 대학살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연구하고 자료를 계속 수집해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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