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평해전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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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평해전을 보고
  • 관리자
  • 승인 2015.07.1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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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정 발행인


제2연평해전은 2002년 우리 모두 한·일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가 한창인 가운데 6월29일 토요일 오전 10시에 벌어졌다. 정부는 월드컵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으니 교전수칙을 경고사격이 아닌 밀어내기로 변경하여 선제사격은 못 하도록 하였다.

이에 북한군은 계획적으로 NLL을 침범해 남하하여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윤영하 참수리정 357호 정장과 박동혁 의무병 등 6명의 우리 해군이 목숨을 잃었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윤영하 소령은 회의에서 경고사격을 안 할 경우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기도 했으나 상급자들에 의해 그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는 마지막 숨지는 순간까지 조타수를 지휘하는 무선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의무병 박동혁 병장은 붕대를 바닥에 놓쳤지만, 침대보를 뜯어와 발목이 잘린 이희완 부장의 발목을 동여맸고, 손가락 잘린 병사의 손을 감싸고, 총을 맞아 피흘리는 배를 감아주었다.

적의 함포공격을 당한 후 정신 못 차리고 계속 공격당하는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동료 병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본인의 최선을 다했다.

박동혁 상병은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되어 잠시 의식을 찾기도 했으나 결국 투병 84일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그의 몸에서 약3Kg의 포탄파편이 나왔다고 한다.

한편 조타수 한상국 중사는 왼팔이 안 좋은 상태라서 육지 근무를 신청한 상태였으나 마침 북의 공격을 받고 죽을힘을 다해 조타봉을 잡았고 숨을 거두면서도 배를 남하시키기 위해 자신의 손을 키에 결박해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실종되었다.

참수리호 침몰 41일 후 잠수부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었다. 그의 부인은 뱃속에 그의 아이를 잉태 중이었다. 이외에도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가 전사하였으며, 전사한 6인의 이름을 딴 전함이 탄생하여 다시 태어나 우리 바다를 지키게 되었다.

우리 국민은 월드컵 열기 속에 TV 자막으로만 연평도 교전 소식을 들었고, 그 3일 후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을 보기 위해 일본으로 출국했다.

해전 2일 후 영결식장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국방부 장관도 자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영해를 지키다 적의 선제기습을 받고 젊은 목숨을 바쳤는데 국가 지도자들이 그 희생을 위로하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엄연히 우리의 허점을 노리고 타격을 가할 자세가 된 적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교전수칙을 낮추는 것부터 우리는 무장을 해제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매사에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듣고 거기에 맞춰서 대응하게 된다. 사람 봐가면서 대응하는 것이다. 손자병법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전쟁을 잘하는 장수는 싸우기 전에 미리 승리할 준비를 한다”라고 했다.

이미 진 상태에서 싸움에 임하는 것은 있어선 안 된다. 완벽한 대비태세와 적과의 외교심리전에서 미리 기세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이미 이겨놓고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렵게 탄생하고 지켜낸 나라다. 지금과 같은 수준의 발전은 세계 역사에도 유일무이한 케이스다. 호국의 달 6월을 맞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젊은 군인과 이역만리 모르는 나라 땅,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서 숨져간 많은 호국영령을 기려볼 때이다.

지금 우리가 각자 자기행복을 위해 애쓸 수 있는 것은 6.25 사변과 연평해전을 비롯한 수많은 선열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내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전의 우리 선조와 선배들의 피땀 위에 우리가 서 있고 그 혜택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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