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코스프레를 멈춰라
논설주간 홍정덕 양주문화원 양주학연구소장
임금이 훙서(薨逝)한 후 국장의 모든 절차가 종료되면 죽은 왕의 신위를 종묘 정전 새로 만든 신실에 모시는데 그때 그의 신위를 모신 신실의 명칭을 묘호(廟號)라고 한다. 흔히 우리가 태, 정, 태, 세, 문. 단, 세… 하며 외웠던 그리고 역대 왕들을 부르는 세종, 단종, 영조가 바로 묘호다.
묘호에는 조(祖)와 종(宗)의 구분이 있어 대개 조(祖)가 종(宗)보다 격이 높다고 여긴다. 인조(仁祖)가 바로 그 조(祖)의 하나이다.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죽은 아버지 정원군의 원한을 설원할 목적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1623년 조선의 16대 국왕에 올랐다. 그리고 1637년 청의 숭덕제 훙타이지에게 우리 민족사의 가장 큰 치욕 중 하나인 삼전도 항복례를 행하게 된다. 남한산성에 피난하여 장장 47일 간 치열하게 항거하였지만 결국 적진으로 끌려 나와 수항단 아래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적 항복 의식을 치러야 했던 그는 무도하지만 강력하였던 오랑캐 여진족이 저지른 침략의 희생자로 부각되고 민족사에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각인된다.
근래 이 남한산성 전투를 묘사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며 그 당시 청에 항복하여 고난 당하는 민중을 구하여야 한다는 주화파와 나라가 멸망할지언정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결코 불의에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척화파의 치열한 대립조차 긍정적으로 재평가 되었고 심지어 이 영화를 시청한 중국인들이 스스로 조선 역사에 죄를 지었다고 새로 인식하였다는 영화평이 전해지고 더불어 인조의 수난에 대한 긍정적 공감대가 확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화 언어에 설득당해 실제 인조 정권의 본질을 간과 해서는 안된다. 인조 정권의 실상은 처절히 실패한 정권이다. 인조의 반정은 사실 광해군 정권 내부의 호응에 힘입은 바가 더 컸다. 그런데도 인조는 즉위 후 작위적이고 편파적인 논공행상으로 인사에 실패하면서 결국 이괄의 난과 호란으로 연결되는 국란을 자초한다.
거기 더하여 단지 광해군 정권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수백 명의 관리를 처단하여 인적 자원을 소멸하였고 특히 박엽(朴燁), 이괄(李适) 같은 뛰어난 장재들을 처형하여 국방력이 결정적으로 약화 되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의 가장 큰 실책은 외교 실패이다. 이미 대륙의 형세는 망국으로 치닫는 명(明)을 신흥 청(淸) 제국이 압도하고 있었는데도 명 일변도의 편중 외교로 청의 침략을 자초하게 된다.
국방 역시 실속 없는 관념적 대책으로 일관하여 박엽이 구축한 대적 정보 인프라를 모조리 해체하고 평안감사로 장기간 재직하며 박엽이 저축해 놓았던 군량을 포함한 보급 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킨다.
내외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친 정원군을 왕으로 추서하는 일로 국론을 분열시켰고 자신의 왕위 보전에 저해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근거 없는 판단만으로 장남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세손 4명을 죽이고 유배하는 치졸한 조치로 왕통의 정통성을 스스로 붕괴시키기도 하였다.
자신의 안전에만 몰두하여 전략적 가치가 전무한 북한산성을 쌓는 대신 청으로 끌려간 수십만의 조선 포로는 그대로 방치하여 한 많은 일생을 이역 땅의 노예와 노리개로 전락시켜 버렸다.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명제를 자주 사용한다. 이의가 없는 분명히 맞는 말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명제를 어디에 어떤 상황에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작금 우리나라를 에워싼 외교, 국방, 정치, 경제, 교육의 환경은 전방위적으로 어둡고 어려워지고 있다. 확대되는 도처의 전쟁, 더 치열해지는 경제 환경, 더 가혹한 가치와 이념의 대립, 세대 간의 갈등에다 증가하는 민생 범죄, 점점 더 효율성을 잃어가는 국가 정책들 그러니 제발 역사에서 배우자. 인조의 실패는 이제 우리의 실패가 될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