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속 작은 모래알

논설주간 홍정덕 양주학 연구소장

2026-10-14     한북신문
논설주간 홍정덕 양주학 연구소장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북경 근처에 1800명의 군대를 주둔시켰고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성공한 이후에도 하북 일대로 진출할 목적으로 병력의 규모를 5600명까지 증강하자 중국 국민당군 역시 8만의 병력과 동북군 잔여 세력 등을 합쳐 총 23만 명을 주둔시켰다. 특히 양측이 첨예하게 대치하던 노구교지역에는 국민당군 37사단과 21구단이 배치되어 수비를 담당하게 된다.

양측의 외교 협상이 실패한 후 관동군 참모장 도죠 히데끼는 2만의 병력을 증강하였고 1931년 6월25일부터 대규모의 기동훈련을 노구교 지역에서 진행하게 된다. 문제는 이 기동훈련 과정에서 발생한다.

7월6일 중국 주둔 일본 관동군 제1 보병 연대 3대대장 이치키 기요나오 소좌가 500명의 일본군을 지휘하여 노구교 동북쪽 중국 관할 구역에서 실탄 사격 훈련을 실시하자 중국군은 일본군이 중국군 기지 100m 안에 진입하면 대응 사격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다행히도 7월7일 밤까지 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치키는 훈련을 끝내고 철수하기로 결정해 사태는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7일 밤 10시40분 용왕묘(龍王廟) 방면과 노구교 제방 쪽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고 철수 중이던 8중대장 시미즈 세쓰오 대위는 즉각 휘하 병사들을 점검한 결과 기병 척후병인 이등병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시미즈는 이것을 중국군의 공격에 의한 실종으로 간주하고 이치키에게 중국군의 선제공격으로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올린다. 이에 일본군은 중국군 관할 완평성 내에서 실종 병사를 수색하겠다고 통보하고 치열한 교섭 끝에 중일 양국군이 공동으로 조사, 수색을 실시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그런데 한창 협상이 진행되던 와중인 7월8일 새벽 4시20분 갑자기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가 현장에 출동해 있는 이치키 기요나오 소좌의 3대대에게 즉각 중국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양국군은 완평현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한 일본은 전선을 확대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다시 협상에 들어갔고, 타협을 원하였던 중국이 이에 호응하여 7월11일 오후 8시 중국 29군 대표는 일본군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여 장래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며 펑타이의 일본군과 인접한 완평현성 및 용왕묘에는 중국군을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의 정전합의문을 발표한다.

이후 이 사건은 결국 중국 국민당이 국가의 굴욕이라고 판단하여 항일전을 본격화하면서 소위 지나사변이라는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어이없는 것은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실종병사가 불과 20여분 만에 부대에 복귀하였고 점호에 빠진 이유는 설사로 인한 배변이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 작은 사건이 너무나도 엄청난 전화(戰禍)로 연결되었는데 이는 도죠 히데끼, 무타구치 렌야 등 일본군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비무장지대 우리 측 관할지역에 무단으로 침공해 지뢰를 설치히였고 이를 조사하던 우리 병사들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노구교 사건은 이 사태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를 엄혹히 교시한다. 전선의 확대를 염려하여 오히려 피해자인 중국군이 사과한 그 결과가 얼마나 냉혹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신발 안에 든 작은 모래알은 결국 여행을 망치게 된다. 바로 신발을 벗고 말끔히 털어내야 한다.

이런 불편은 참는 것이 아니다. 결국 평화도 안전도 힘 있는 자의 단호한 결단에 의하여만 존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