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사료로 본 고조선(기자조선)

김현규 논설위원

2026-03-27     한북신문
김현규 논설위원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 가장 논쟁이 되어온 것이 기자조선과 한사군 존재여부였다.

이는 고조선 영토 및 강역과도 직접 관련이 있는데 한·중 사료를 비교 분석해보면 기자조선의 한반도설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환단고기에는 1114년, 단군솔나 37년 기자가 서화로 옮겨와 살면서 고조선이 보낸 인사를 사절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반면 사기 주 본기에는 주 무왕이 은을 정복하고 기자를 석방한 다음 2년 후 찾아가서 은나라가 망한 까닭을 물었더니 기자가 국가의 존립과 패망에 대해서만 말했고 이에 무왕도 당황해 하늘의 이치에 대해 말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사기 송미자 세가에는 하남성 양국몽현에 기자 묘(墓)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중국의 지리서인 수경주에는 양국몽현(산둥성 조현)의 박벌성안에 탕임금 무덤과 그 서쪽에 기자 무덤과 기자 독서대가 있다고 했다.

이로 보아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 않았다고 한 것은 기자가 망국인으로 번조선 서쪽 영토(현재 중국 영토)에 무리를 이끌고 와서 은거한 것을 모호한 표현으로 날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평양 기림리에 있는 기자묘와 사당은 무엇인가?

『고려사 절요』에는 1102년 숙종 년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에 교화되기는 기자에서 비롯되었는데 아직도 사당이 없으니 분묘를 찾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낼 것」을 청하여서 이에 따랐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 사서에는 BC 194년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배를 타고 바다 건너 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있고 단재 신채호 선생도 조선사 총론에서 번조선에 살던 기자의 먼 후손인 기허가 BC 323년 왕이 되어 왕위를 이어오다 후손 기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망했다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평양에 있는 기자묘는 가묘가 아니면 기준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중국의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과 5C에 편찬된 수경주에는 한반도와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BC 11C 당시 무왕이 사방 5천리 영토를 가진 내륙 국가로 남만, 북적, 동쪽은 동이족으로 막혀있던 은나라를 멸한 다음 기자를 석방하고 한반도내 고조선의 조선 후로 봉했다는 것은 후대에 지어낸 허구이다.

오히려 석방 2년 후 기자가 주 무왕을 만난 사실과 그가 은나라도읍과 왕궁터를 지나가다 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한탄한 맥수지탄은 기자가 한반도에 온 게 아니라 동래하여 번조선 영토에 살다 고향에 묻혔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에 「현도, 낙랑(조선현, 현 베이징 부근)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를 봉했던 곳이다.… 고로 공자가(노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배로 (발해만) 바다 건너와 (군자국에) 살고자 했던 곳이다」라고 했음에도 기자가 BC 11C 당시 국가가 성립되지도 않은 한반도에 왔다는 억지 논리는 한국의 고대 역사를 왜곡하고 영토를 축소시키는 것으로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