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땅이름유래-23) 산곡동(山谷洞)
김추윤 (이학박사, 신한대 중앙도서관장)
2015-10-20 김추윤

송산동은 용현동(龍峴洞), 고산동(高山洞), 산곡동(山谷洞), 민락동(民樂洞), 낙양동(樂陽洞) 등 5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는 행정동이다. 즉 산곡동은 송산동에 속한 법정동이다.
산곡동(山谷洞)은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 양주군 내동면(內洞面) 산곡리(山谷里)와 별비면(別非面) 흑석리(黑石里)를 합하여 별내면(別內面) 산곡리(山谷里)로 개칭하였다. 그후 고산동과 함께 1980년 4월 1일 의정부시(議政府市)에 편입되면서 산곡동이 되었다.
산곡동(山谷洞)은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 양주군 내동면(內洞面) 산곡리(山谷里)와 별비면(別非面) 흑석리(黑石里)를 합하여 별내면(別內面) 산곡리(山谷里)로 개칭하였다. 그후 고산동과 함께 1980년 4월 1일 의정부시(議政府市)에 편입되면서 산곡동이 되었다.
산곡동의 유래는 ‘산골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또 다른 설에는 이 곳에 있는 ‘충신열녀(忠臣烈女)와 관련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안산김씨(安山金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가 강원도 금성부 산곡간으로 피난하였는데, 갑자기 왜병을 만나자 김씨는 품고 있던 은장도로, 신씨는 물에 투신하여 각각 자결하였다.
1592년 6월 6일의 일로 이듬해에 ‘두 동서가 함께 정절을 지켰다’고 하여 충신열녀라는 정려(旌閭)를 내리고 당시 영의정이던 이호민(李好閔)이 쌍절비문(雙節碑文)을 지어 내렸다. 이후 마을 이름을 그들이 자결한 곳인 산곡(山谷)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1592년 6월 6일의 일로 이듬해에 ‘두 동서가 함께 정절을 지켰다’고 하여 충신열녀라는 정려(旌閭)를 내리고 당시 영의정이던 이호민(李好閔)이 쌍절비문(雙節碑文)을 지어 내렸다. 이후 마을 이름을 그들이 자결한 곳인 산곡(山谷)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거문돌은 현재는 흑석동(黑石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東幕(동막)으로 불렸다. 동막은 이 마을 동쪽에 더운 물이 땅에서 솟아올라서 그 물로 사람들이 막을 세워 놓고 목욕을 하였다는 온두막골(溫逗幕谷)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후 묵현(默峴)이라고도 불렸다. 묵현은 거문돌 위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가 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국수당할미봉은 상봉과 오리봉의 중간에 있는 봉우리로 거문돌에서는 함박바위봉이라고 부르고, 자금동 쪽에서는 쪽두리봉이라고 부른다. 퉁통두란 이씨묘는 능안과 꽃마루재 사이의 능선에 있으며, 퉁두란 이씨는 고려 공민왕때 귀화하여 이(李)씨의 성과 청해(靑海)를 본관으로 하사받아 이두란(李豆蘭) 또는 이지란(李之蘭)이라고도 하며, 조선건국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은선동(隱仙洞)은 수락산의 기암괴석이 만학천봉(萬壑千峰)을 이루어 기복전회(起伏轉回)하여 이룬 계곡으로 옛 사람들이 신선이 놀다가 자취를 감춘 곳이라고 하여 암벽에다 ‘隱仙洞’이라고 음각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있는 폭포를 은선동 폭포라고 한다.
쌍절비는 임진왜란 당시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자결한 안산김씨(安山金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를 기려 세운 비석으로 두 열녀와 유질(柳秩)을 모시고 있는 정려각(旌閭閣) 안에 서 있다. 어두니고개는 물도랑같이 양쪽이 상당히 높고 긴 골짜기에 있는 고개로, 나무가 많아서 항상 어둡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남영안(南營案)은 예전에 군영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바로 밑에 성지우물터가 있고, 여기서 8번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동무봉과 배양현이 나온다. 이 동무봉과 마주보고 있는 것이 갈무봉이며, 갈무봉 밑에 활터가 있고, 활터 밑에 말을 매었다는 위마전이 있다. 또 뱀골 위에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를 왕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남영안의 넓이는 약 만오천여평 정도로 산등성은 가파르고 서쪽으로 성지우물 터가 있는 곳으로만 통행로가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6.25사변 때도 인민군이 참호를 파놓고 잠복하던 곳이다. 외재는 잔돌백이에서 능안말로 가는 작은 고개로,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주둔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외재’는 ‘외미’와 같은 계열로 보아서 ‘외딴고개’라는 뜻에 더 가깝다. 진등은 빼뻘과 거문돌의 경계가 되는 등성이로 능안에서 부터 산줄기가 길게 뻗어있다. 바닥이 진흙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그 이유는 바로 밑에 성지우물터가 있고, 여기서 8번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동무봉과 배양현이 나온다. 이 동무봉과 마주보고 있는 것이 갈무봉이며, 갈무봉 밑에 활터가 있고, 활터 밑에 말을 매었다는 위마전이 있다. 또 뱀골 위에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를 왕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남영안의 넓이는 약 만오천여평 정도로 산등성은 가파르고 서쪽으로 성지우물 터가 있는 곳으로만 통행로가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6.25사변 때도 인민군이 참호를 파놓고 잠복하던 곳이다. 외재는 잔돌백이에서 능안말로 가는 작은 고개로,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주둔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외재’는 ‘외미’와 같은 계열로 보아서 ‘외딴고개’라는 뜻에 더 가깝다. 진등은 빼뻘과 거문돌의 경계가 되는 등성이로 능안에서 부터 산줄기가 길게 뻗어있다. 바닥이 진흙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