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논리, 마음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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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논리, 마음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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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0.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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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논설위원. 목사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 자주 발생한다.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똥을 치우지 않아서 화제가 된 사건, 경희대학교 학생이 청소하는 아줌마에게 욕을 한 사건 또 국회의원이 대학생들 앞에서 성희롱을 한 사건 등은 인터넷이 없던 과거에는 일어나기 힘든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 모두가 사진을 찍거나 녹취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휴대폰을 소지하고 다니기에 요즘에는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이 언제 국제적인 문제(issue)가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사실 녹취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건 자체가 문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생활 침해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네티즌 대부분은 이 행위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에 대한 논의도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이 주제가 초점이 아니므로, 인터넷에 퍼진 그 사건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들은 법적인 제제를 받을 만큼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개인의 윤리 도덕적 차원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재판관인양 심판한다. 어떤 사람은 비록 이것이 법적인 문제가 아닐지라도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안에 대해서는 네티즌들의 비판을 통해서라도 제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공공장소에서의 잘못들이 수정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몇 가지 가정을 해보자. 만약 지하철에서 조금만 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만약 경희대 학생이 좀 더 마음을 조절해서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면? 국회의원이 좀 더 신중하게 학생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물론 이들은 아무런 주목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타인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그 주변에 있던 타인으로 하여금 그냥 무관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급기야 많은 네티즌들의 마음이 흥분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 네티즌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도덕적인 잘못에 대한 질타도 좋지만, 나도 그러한 입장이 될 수도 있음을 감안해 스스로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과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 마음 씀이 심하게 주변 사람이나 많은 타인을 찌푸리게 하거나 할 경우, 결국 법이 그 마음 씀을 조정하기에 이른다.사람들은 법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법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구약의 10계명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예수가 일곱 가지 계명에 대해서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구약 율법에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살인의 시작은 화내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화내거나 욕하지 말라고 예수는 말한다. 구약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마다 다 간음한 것이라고 말했다. 구약의 율법에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예수는 말하였다. 구약에 는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했고,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지만, 예수는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였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여 총 일곱 자기 계명을 예수는 말한 바 있다. 현대인들은 예수의 이 계명은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는 이 계명을 율법초항처럼 지키라고 하기 보다는, 율법의 정신에 다가설 것을 요구한다. 이 정신이란 무엇인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예수의 이 ‘계명’은 우리의 마음가짐을 문제 삼는 것이다.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설사 나에게 해를 끼진 이웃이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보복이나 복수는 신의 섭리에 맡기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의 이른바 ‘상식’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준다. 만약 이렇게 하지않고, 시비가 가려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상대방의 잘못이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 모든 문제가 스스로 만족할 정도로 해결될 때까지 그 문제를 신경 쓰며 떠안고 살아야 한다. 실제로 법정시비에 말린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어떻게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한다. 빨리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잊고 출발했다면 어떠했을까? 그 긴 소송의 기간 동안 잠 못 이루며 신경 쓰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잘못과 불의를 그냥 간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잘잘못에 대한 태도는 분명히 갖되 그 모든 시비판정의 문제는 신에게 맡기고 용서하며 살아야 결국 나에게 행복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율볍은 오늘날로 치면 법에 해당한다. 구약의 율법사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법관들은 법을 준수하고 지키는 사람들이다. 어디서나 법은 존재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자칫 우리는 법이 규칙 안에 들어있는 법의 정신을 망각할 때가 있다. 법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모든 시민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헌법 10조에 나오는 행복 추구권이 법의 기본정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결국 불행은 잘못된 마음가짐에서 온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복수, 등의 모든 마음에서 온다. 그러기에 이 마음을 다시 다스려야 한다. 너무 사람들이 말하는 ‘상식’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잘 추스르고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첫 번째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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