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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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려는 자
  • 한북신문
  • 승인 2023.04.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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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친일파를 지나 매국노로 매도당하는 을사오적 박제순은 처절할 정도로 매국의 한길에 매진하였던 민족과 역사의 죄인이었다.

박제순은 충청도관찰사 재직 중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의 토벌에 앞장섰다. 이후 외부대신이 되어 일본공사 하야시와 함께 을사늑약에 서명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이른바 을사5적으로 여러 차례 피격을 당하면서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다.

박제순의 아들 박부양 역시 대를 이은 친일행각자로 11세에 아버지 박제순의 자작 작위를 습작하며 전북 임실군수, 전북 순창군수, 경기 안성군수 등 조선총독부와 중추원에서 관리로 재직하였고 당연히 자신의 아들도 친일의 길에서 더러운 부귀영화를 이어 누리게 되기를 희망하였고 아들 박승유(朴勝裕)를 강권하여 일본군에 입대시키지만 그러나 그의 희망은 순간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만다.

1924년 8월20일 태어난 박승유는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군에 자원입대하여 중화민국 절강성 의오현에 주둔하던 요코이(橫井)부대에 배속되었으나 그해 10월 부대를 탈영하였고 바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면서 동년 10월29일 대한민국 광복군 제2지대 강남분대에 배속된다. 이후 강소성 남경시, 무석현, 안휘성 무호현 등지에서 광복군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야전 방송대원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조선인 병사의 탈출과 항일군의 사기를 고취하는 등 선전활동 및 심리전에서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절 박승유는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라고 자책하면서 가명으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1953년 정전 후에는 원광대학교 교육학과 강사, 휘경여중·휘경여고 교사 등으로 근무하다가 1963년에야 그가 숨겨오던 그의 항일업적이 드러나게 되었고 사후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는 1990년 11월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애국충정은 결국 할아버지, 아버지의 매국 추행을 씻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전두환의 손자가 공식으로 할아버지의 죄과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한편 광주 현장을 찾아 5.18묘지에 참배하며 유가족들에게 사죄하였다고 한다.

피해자의 무덤의 비석을 자신의 옷으로 닦는 그의 행위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가슴은 일견 복잡하다. 용기를 내 준 그의 사과를 고맙게 받아들이며 그를 안아주는 유가족이 있는 반면 그의 느닷없어 보이는 행위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어언 43년, 이제 우리는 그 눈물의 강을 건너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광주로 향한 그의 발걸음이 부디 그 강을 건너는 첫 징검돌이 되기를 진심으로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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