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Tried!’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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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Tried!’ 고르바초프
  • 한북신문
  • 승인 2022.10.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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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랑 논설위원·경복대학교 명예교수
논설위원 남궁 랑 교수
논설위원 남궁 랑 교수

20세기를 격동의 세기라고 해도 될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으며(1939), 인류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고(1945), 역시 인류 최초로 인간(아폴로)이 달에 착륙하였으며(1969),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와 함께 1992년에는 세계 양대산맥중 하나인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해체되었다.

그리고 연방 해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됐던 소련의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최근에 91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고르바초프는 남부 러시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모스크바국립대학을 졸업한 뒤 공산당의 열성 당원이 됐다. 일찌감치 청년공산주의자연맹의 지역 서기장이 된 뒤 중앙 무대로 진출하여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농업서기로 승진했고 54세 때 최연소로 최고지도자인 소련 공산당서기장으로 지명됐다.

그 당시 전임 서기장들이었던 브레즈네프는 3년 전부터 병환으로 집무를 보지 못했고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역시 고령과 질환으로 서기장에 오른지 1~2년 만에 타계하여 최고 지도자들의 모습이 작동불능 상태였을 뿐 아니라 미국과 벌인 군비경쟁과 우주경쟁 등으로 식빵과 아이들 우유 등을 구할 수 없을 만큼 소련의 경제상황 역시 참으로 심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최고 지도자에 오른 고프바초프의 첫 관심사는 위기에 빠진 소련의 경제를 살려야만 했던 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통제경제의 사령탑인 공산당도 개혁해야만 했다. 이 때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개방)이며 전자가 정치·경제분야 개혁 정책이었다면 후자는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정보·언론 등의 개방 정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렇게 견고했던 사회주의 체제 소련에 시장경제가 도입되어 기업의 역할이 크게 증대되었고 독립채산제 시대가 열렸으며, 정치방식에 있어서도 인민위원 직선제 등 민주적 선거제도가 마련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는 세계사적 흐름에도 영향을 미쳐 동서 양 진영 간 해묵은 이데올로기 갈등을 축소하면서 핵무기 개발 제한과 50만명의 병력감축 등 탈 이념화와 탈군사화 이슈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족주의 분출에 따라 1989년 동독붕괴를 시작으로 15개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고르바초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992년 1월 1일을 기해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무너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세계 양대 산맥 중 하나였던 소련이 전쟁에서 패한 것도 아닌데 왜 무너졌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체제의 경쟁에서 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그 당시 지도자들의 고령과 질환 등으로 다이내믹한 통치를 못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 넓은 영토에서 인구 대비 적재적소의 효율적인 경제활동을 못하는 폐쇄 시스템으로 국민들의 가장 기본문제이며 생리적 욕구인 의식주마저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에 몰린데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이 국민들의 삶의 질에 대한 인식을 높임과 동시에 구 소련 연방국가들에게도 민족의식을 제고시키게 되어 각각 독립에 이르게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고르바초프는 세계사적으로 매우 특별한(큰) 변화를 이끈 지도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현재 전쟁 중인 자국 내 상황발생으로 인하여 20세기 국민영웅에서 21세기 국민역적(소련 해체 결과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유발)으로 평가받는 아쉬움도 있지만 세계사적으로 전쟁 없이 냉전을 해소시키고 적대이념을 다소라도 축소시킨 장본인임에는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이제 중남미의 쿠바를 제외하면 사회주의 국가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대체로 중국과 북한 정도이다. 그 중 중국은 소련을 대체하여 G2 반열에 오르기 위해 각종 굴기 사업을 국가 주도하에 민간과 함께 병행하고 있으나 북한은 소련 해체의 과정을 간접적으로 학습해서인지 개혁과 개방에 철저하게 소극적이다.

내부 개혁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개혁보다는 개방으로 폐쇄된 수준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남한과의 격차가 너무 커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영속될 수는 없을 것이고 언젠가는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닌 소련처럼 전쟁 없이 남북통일에 이르게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길 기대해 보고 싶다. 고르바초프 처럼!

최근 영면하기 전까지도 이데올로기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며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면서 자신이 죽으면 냉전종식과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상징으로 묘비에 ‘We Tried!’라고 새겨주길 유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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