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훈삭제(僞勳削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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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훈삭제(僞勳削除)
  • 한북신문
  • 승인 2022.07.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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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논설위원 홍정덕
논설위원 홍정덕

1519년 10월 14일 조광조(趙光祖)가 주동이 된 사림 대간(臺諫)들이 국왕 중종에게 극력 상소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들을 재조사하기를 청원하였다.

○…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고, 대간(臺諫) 전원이 입대(入對)하였다. 조광조가 아뢰기를 “정국공신(靖國功臣)은 이미 10년이 지난 오래된 일이지만 허위가 많았습니다. 성희안은 그리 용렬한 자는 아니나 그 기량이 원대하지 않으니 큰 공이 있기는 하나 그 인물은 칭찬할 것이 없습니다. 박원종(朴元宗)은 순직(純直)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으나 공신의 기록을 유자광이 홀로 맡아서 하였으므로 이렇게까지 외람하였습니다.”하고, 정언(正言) 김익이 아뢰기를 “유자광이 제 자제를 기록하려고 먼저 성희안·유순정(柳順汀)의 자제를 기록하였습니다.”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사람은 다 부귀(富貴)를 꾀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利)의 근원이 크게 열렸으니 이때에 이의 근원을 분명히 끊지 않으면 누구인들 부귀를 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겠습니까? 지금 쾌히 좇지 않으시면 뒤에는 개정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입니다.”하고, 이성동이 아뢰기를 “사류(士類)가 이 공신들 때문에 마음이 불쾌하여 늘 울분을 품습니다. 인아의 무리까지 다 공신이 되었으니 이것은 매우 마음 아픕니다.” < 중종실록 중종 14년 10월 25일 을유>

결국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공신이 된 <정국공신(靖國功臣)> 117명 중 2등과 3등 일부, 4등 전부 해서 총 76명의 <위훈(僞勳)>, 즉 ‘거짓 공적’이 공식적으로 삭제되고 만다.

물론 이에는 훈구파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실제로는 반정에 참가하지 않은 자신들 측근 세력은 물론 일부 친척들까지를 공공연하게 훈신으로 책훈한 사실이 진작부터 문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이 <위훈삭제(僞勳削除)> 역시 사림파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추진하였던 또한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중종반정의 시혜자 중 가장 큰 위훈(僞勳) 당사자는 바로 국왕인 중종 자신이었다. 그는 반정이 일어나는 당일까지도 반정에 참가하기는커녕 반정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몰랐었다.

심지어는 연산군을 축출한 후 후일에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위에 추대하겠다는 반정공신들의 주청을 그의 어머니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는 반대하면서 차라리 연산군의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할 정도였다. 그러니 위훈(僞勳)을 삭제당할 가장 최우선자는 바로 중종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는 정계에서 축출되고 만다.

근래에 독립투쟁이나 한국전쟁. 최근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책정된 공훈자들을 다시 조사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상당수의 공로자들이 실제와 달리 책훈되었으니 조사하여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인데 만일 의거의 공훈자들 중에 일부 실제와 달리 왜곡된 경로로 선정된 이들이 있다면 이는 의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공로자들을 올바로 현창하기 위하여라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사에 앞서 먼저 확보해야할 당위는 조사의 제반 과정에 정치적인 의도나 진영논리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왜곡의 시정을 명목으로 하는 또 다른 왜곡이 있어서는 더욱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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