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이 남긴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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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이 남긴 폐해
  • 한북신문
  • 승인 2022.04.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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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선조 8년(1575) 동인과 서인으로 당론이 분산된 이후 조선의 정치계가 숱한 굴곡을 맞이하였으나 이 당쟁이 가장 심각한 병폐로 치닫기 시작한 것은 ‘기축옥사(己丑獄事)’ 즉,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빌미로 서인(西人)이 동인세력을 탄압한 이후였다. 그러나 이 당론의 대립의 조정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당파간의 분쟁에서 왕을 축출하는 인조반정으로 확장되자 이제 조선은 정치의 본연이 행정이 아닌 당쟁에 무게 중심이 실리기 시작한다.

인조반정의 결과 전 정권인 광해조의 중신 350명이 죽거나 유배되는 대규모 피의 숙청이 진행되었고 집권당인 북인이 소멸되는 데 이후 당쟁에서의 패배는 바로 죽음이라는 섬뜩한 결말로 이어지며 당쟁은 그야말로 당파와 소속 당류 모두가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현안이 되고 말았다.

당쟁을 자신의 통치술에 적용하였던 숙종조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환국을 통해 장희빈 사건으로 남인이 소멸되어 동인은 거의 세력을 잃게 되자 이번에는 서인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경종(景宗)의 왕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소론에 의해 노론의 핵심이었던 김창·이이명·이건명·조태채가 처형되었고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득세한 노론은 소론을 철저히 박멸하려 하였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후 다시 일부 가세를 회복한 소론을 순조가 즉위하면서 신유박해를 계기로 다시 말살하면서 노론의 일당 집권이 구한말 까지 이어지지만 그 사이 다시 노론은 일부 세력가가 중심이 되는 세도정치로 이전되면서 더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당쟁에 대하여 이를 일부 긍정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이 있기는 하다. 예컨대 당론의 쟁투를 통하여 국가 정책을 다양한 시각으로 검증할 수 있었다거나 국왕의 전제권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거나 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당쟁을 바라보는 일부 이런 시각을 일거에 덮는 치명적인 취약점이 당쟁 내에 존재한다. 바로 전 정권 또는 상대 당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마땅히 제거해야할 적폐로 규정하는 독선이다.

이와 같은 인식과 상황 아래서는 서로가 가진 이견이 정론의 전개과정에서 상호 수합되거나 갈등이 전향적으로 조정될 수 없다. 오로지 상대 당을 제압하고 그 세력을 말살하려는 치졸한 집착이 지속되었을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역대 정권은 모두 집권과 동시에 전 정권의 실권자들을 조사하고 실정(失政)을 드러내는 한편 그들을 적폐로 규정하여 정죄하고 투옥하는 일들을 상습적으로 반복해 왔다. 왜 대통령이 감옥에 가야하고 아들이나 가족이 수사선 상에 오르며 정책 결정의 비화들이 공개되고 있는가? 왜 정권을 잃은 측에서 “대통령을 지키겠다”, “우리 후보를 지키겠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심이 공포되어야 하고 자신들도 그리하겠다고 공약했던 청와대 입주거부 약속 이행에 발목을 잡는가?

그 지긋지긋했던 당쟁의 유산 정치보복과 적폐청산을 이제는 멈추라! 국민들이 만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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