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독립운동가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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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독립운동가의 아들
  • 한북신문
  • 승인 2022.04.0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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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논설주간 홍정덕
논설주간 홍정덕

도산 안창호 선생과의 첫 만남은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을지로 입구의 무너져 내릴 것 같던 흥사단 본부 건물 강당에 걸린 커다란 그분의 사진이었다.

매주 금요일 당시 흥사단은 ‘금요개척자 강좌’라는 인문 시사강좌를 열었고 나는 그곳에서 안병욱, 이용설, 김형석, 함석헌, 강원룡, 주요한 등 당대 석학들의 강의를 들으며 젊은 열기로 들떠 올랐었다. 거기서 그분들을 통해 알게 된 안창호라는 한 선각자의 삶, 조국과 신앙과 젊은이를 품고 그가 지향하고 제시했던 인격자, 애국자의 삶을 나는 배우려고 애썼고 지금의 변변찮은 내 삶은 내 뒤에서 나를 추동해 준 그 분의 가르침이 있었음을 감히 자부할 수 있다.

미주 노동자를 애국, 독립의 길로 이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조직자였으며 무엇보다도 독립을 성취해 낼 사상적인 바탕을 확고히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걸출한 독립운동의 리더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를 위하여 먼저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완성된 인격체로 거듭나야한다고 강조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하였던 자신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기 위해 그는 윤봉길의사의 상해 의거로 인하여 상해 전체에 내려진 자신에 대한 검거령에도 불구하고 생일선물로 인형을 사주겠노라고 했던 친구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갔다가 결국 잠복했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가혹한 옥고를 치르고 결국 순국하게 된다.

안창호 선생이 미주를 떠나 본격적인 독립투쟁에 나서면서 부인 이혜련, 아들 필립, 필선, 딸 수산, 수라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본 채 태어난 막내 필영은 오로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내야 하는 거친 삶의 현장과 부딪히게 된다.

여장부였던 이혜련여사는 억척스레 일하며 가족을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남편 못지않은 독립투쟁가의 길을 걸었고 아들 필립은 미국 최초의 동양인 영화배우로 딸 수산은 미국 최초의 동양인 해군 장교로 그리고 나머지 자녀들 모두 아버지의 명예에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미주 한국인으로 우뚝 선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삶의 뒤에는 언제나 가장이 없고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있는 고독과 고립의 고난을 함께 극복해야하는 어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입학식, 졸업식, 결혼식, 출산 그 모든 자리에 아버지는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나라의 독립운동가 만이 가본 적도 없는 망우리 야산 모퉁이에 묻혀 가물거리며 잊혀지고 있을 뿐이었다.

딸 수산이 아버지와 화해한 것은 긴 세월이 지나 강남에 <도산로>와 <도산공원>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아버지의 유해를 이장하는 의식에 참가했을 때였다. 조국의 독립, 발전된 경제 성숙해진 문화의 현장에서 온 국민이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자신들을 얼마나 인정하는지를 확인하면서 그녀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버림받은 줄 알았던 어머니와 자신들의 외롭던 지난 날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하였던 것이다.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안창호 선생의 막내 아들 필영이 3.1절을 앞두고 2월28일 96세로 별세하였다.

광복회장 김 아무개가 피 같은 공금을 제 주머니 에 마구 긁어 넣다 들통나 광복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던 바로 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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