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석동 평산 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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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평산 신씨
  • 한북신문
  • 승인 2022.02.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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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논설주간 홍정덕
논설주간 홍정덕

의정부 흑석동 속칭 <거문돌>에는 의정부시문화재로 지정된 전주 류씨 묘역이 있고 그 묘역 아랫자락에는 전주류씨의 「쌍절 열녀비각」이 조영되어 있다. 이 비각에는 두분의 열녀에게 내린 「정려(旌閭)」가 모셔져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다.

○ 「전주류씨 9세 사겸공(류영겸)의 부인 안산 김씨와 북천공(류영순)의 부인 평산 신씨는 동서(同壻)간인데 선조25(1592)년 임진왜란 때 함께 피란 중에 강원도 금성현 산골까지 갔으나 홀홀 단신 여자의 몸으로 험준한 산길은 적막하고 급습하는 왜구(倭寇)의 형세를 피할 길이 없어서 망연자실하고 한탄하고 통곡하다가 안산김씨는 돌연히 지니고 있던 은장도(銀粧刀)로 자결(自決)하니 평산 신씨도 동서 간에 의지하여 이곳까지 왔다가 뒤를 따라 냇물에 몸을 던져 한 생애를 마치니 향년 41세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경영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의 이념을 따라 효(孝), 충(忠), 열(烈)을 강조하였고 이에 모범이 되는 실천 사례가 있으면 국가 차원에서 이를 크게 표창하였는데 이를 「정려(旌閭)」라 하였다. 정려가 내리면 당연히 이는 가문의 영예와 성가를 크게 드높이는 일임과 동시에 해당 가문은 물론 마을과 고을에도 이에 따르는 은급이 함께 주어졌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을의 읍격이 상향되거나 가문의 승운이 열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정려(旌閭)」는 나무판에 표창의 종류와 내용을 적어 내리는 것으로 이의 종류를 따라 「충신정려」. 「효자정려」 「열녀정려」로 구분되고 이 정려를 모신 장소에 따라 대문에 현판처럼 붙이면 「정려문」, 작은 집을 지어 모시면 「정려각」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전주 류씨의 쌍절 정려 중 평산 신씨를 설명하는 내용에 보면 그녀가 ‘함경병사 각(恪)’의 따님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즉 부친이 바로 임란의 최초 승리 중의 하나인 해유령(蟹踰嶺)전투를 승리로 이끌고도 오해를 받아 억울하게 죽은 신각(申恪)인 것이다.

같은 해에 같은 왜적으로 인하여 부녀가 각각 열녀와 충신으로 떳떳하게 세상을 떠나신 것이니 장하면서도 슬픈 일이다. 아버지는 양주 해유령 현장 충현사(忠賢祠)에, 따님은 이웃 의정부 거문돌 ‘열녀비각’에 모셔져 제향을 받으니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칭송과 영예가 오롯이 이 부녀의 몫이 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세상도 이념도 가치도 변하였지만 그래도 사적(史蹟)이 지니는 옛 향기조차 변하지는 않는 법, 더러는 가족이 함께 한가한 걸음으로 이웃한 두 유적을 찾아보는 것도 내 향토 사랑의 좋은 방법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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