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왕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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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들의 무덤
  • 한북신문
  • 승인 2021.12.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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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1455년 윤6월11일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남은 생애는 처절하였다.

이미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 십 명의 추종자가 살해되었고 왕위를 빼앗긴 후에

도 복위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또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간 데다 영월로 귀양간 후에 조차 다시 금성대군 등 복위 음모에 관련된 영주선비들이 무수히 처형되어 죽계(竹契)에 붉은 핏물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단종 자신도 영월 객사에서 노비의 손에 목 졸려 죽었고 그 시체는 서강에 버려진 채 물위를 떠 맴돌았는데 이를 참혹히 여긴 호장 엄흥도가 목숨을 무릅쓰고 그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평토장하듯 겨우 묻어주게 된다. 그리고 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이 밝혀져 엄흥도는 충신으로 추앙되고 그 무덤은 장릉(莊陵)으로 복구된다.

1506년 11월6일 폭정에 폭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은 박원종 등이 주도한 변란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불과 몇 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죽어 현지에 묻힌다. 이에 그의 부인인 폐비 신씨가 그의 무덤을 관내로 옮기게 해달라는 청을 넣어 현재의 방학동으로 천장(遷葬)하게 된다. 왕비로 있을 때에 궁녀들에게조차 존대 말을 할 정도로 어진 성품이었던 그의 청을 이복동생 중종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비록 폭압과 음행으로 나라를 나락으로 몰고 갔던 왕이었으나 이미 정치적, 역사적 심판을 받은 터에 유명도 달리하였으니 그나마 그녀의 청원은 그렇게 수리되었다.

1623년 4월11일 왕위에서 축출 당한 광해군은 처음 교동에 위리안치되었으나 청과의 전쟁이 다가오면서 급히 제주도로 이배되어 거기서 1641년 66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무려 17년의 세월을 수발드는 여염집 여인으로부터 ‘영감테기’라는 멸칭을 들을 정도로 비참한 유배 죄인의 삶을 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상례용품을 내리고 왕자의 신분과 법도에 맞추어 장례를 치른다. 평시에 죽으면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제주에서 양주까지 지방관 둘의 호송 속에 운구되어 현재의 자리에 장사되었다. 어머니의 무덤이 남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 그리고 자신이 죽인 동복형 임해군의 무덤 위의 자리이다.

영친은 어린 나이에 일제의 인질로 끌려가 일본 왕실의 공주와 결혼하여 일본의 왕족으로 군인으로 살았다. 광복 후 그는 대한민국과 불화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택을 우리나라의 주일대표부로 사용하게 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거절하였고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가야한다는 이유로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는 등 조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거기에다 자신은 일본여인과 결혼하여 혼혈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또 미국 여인과 결혼하여 왕세손으로서 종묘대제를 주관해야 하는 그의 혈통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그 영친왕이 뇌출혈로 쓰러져 전신 불수의 상태가 되어서야 그는 귀국할 수 있었고 병실에서 단 한걸음도 나와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국민과 그가 화해한 것은 이렇게 그가 죽고 난 다음이었다. 그의 무덤은 국민들의 애도 속에 아버지 고종황제와 형 순종황제가 묻힌 홍(洪), 유릉(裕陵) 한 켠에 마련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장례를 치렀는데 아직도 무덤에 안장되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은 화장한 유해를 다시 연희동 집으로 가지고 갔다. 역사의 심판, 정치적 심판은 그들의 사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묻히고 무덤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량이 아닌 또 다른 예의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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