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군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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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군의 무덤
  • 한북신문
  • 승인 2021.02.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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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다음 해인 1609년 11월30일 예조(禮曹)에서 왕에게 건의문이 올라왔다.

○ “노산군(魯山君)의 분묘가 먼 영외(嶺外)에 있는데 본군이 사명일(四名日)에 품관(品官)으로 하여금 간략하게 제사를 지내게는 하지만 제사 의식이 조촐하여 제대로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인(夫人)의 묘소에 이르러서는 양주(楊州)의 풍양(豊壤)에 있지만 초동과 목수를 금지시키지 않고 제사가 단절되어 도리어 자손이 있는 우의(牛醫)나 마졸(馬卒)에게도 미치지 못하니 생각하면 측은하여 저희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혁명으로 쫓겨난 전대의 군주라 하더라도 모두 받들어 제사하는 전례(典禮)가 있었으니, 우리 조정의 숭의전(崇義殿)도 그런 것의 하나입니다. 그러니 따로 몇 칸의 사우(祀宇)를 건립하여 두 분의 신주를 받들어 해마다 한식 및 양 기일에는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 분묘가 있는 곳에는 별도로 봉식하고 수총인을 더 정하여 항상 수호하도록 하며 사명일과 양 기일에는 본 고을의 수령이 제수를 깨끗하게 준비하여 직접 가서 제사를 지내되, 조정에서 해마다 향(香)을 내리고 축문(祝文)은 조정의 명을 공경히 받들어 지낸다는 뜻으로 지어 항상 사용한다면 정례(情禮)와 사체(事體)에 있어 거의 중도(中道)를 쓰일 수 있을 것이며 성상의 예의를 소중히 여기고 조상을 추모하는 뜻이 만세토록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연산군을 일체로 시행하는 일의 당부(當否)와 아울러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탈(定奪)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산군 즉 단종(端宗)과 반정(反正)으로 축출된 연산군(燕山君)의 무덤과 사당을 수축하고 군주의 격식과 의례에 맞는 제사를 지내며 분묘를 왕릉 수호의 규례대로 제대로 관리할 서리(書吏)를 배정하여 관리하라는 내용이다.

노산군의 직위 복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그를 복권 시키는 것은 단종을 몰아낸 세조(世祖)의 정통성을 침해하는 일이다. 따라서 세조의 후손으로 왕위를 계승한 현 임금을 포함 한 역대 왕의 명분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된다. 하물며 연산군의 분묘를 정비하고 예를 갖추어 제사하는 문제 역시 중종반정(中宗反正) 자체에 대한 도전일 수 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와 같은 건의에 흔쾌히 “윤허(允許)한다”고 건의를 허락한다.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문제가 수면 위에 떠올라 정치판이 시끄럽다. 당파마다 유(有), 불리(不利)를 계산하고 자기 당파를 지지하는 무리들의 의견을 재고 있다.

국민이 선출한 권력의 죄과를 따져 대통령들을 감옥에 수감한지 벌써 여러 해, 국민은 이제 그 죄벌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그 긴 형벌에 민망하고 딱하다. 법리와 정론을 떠나 이제는 족쇄를 풀어야 할 때 아닐까?

실록 기사 말미에 사관(史官)은 이렇게 사론(史論)을 붙였다.

○ 사신은 논한다. 노산군의 묘에 대해서 조정이 본군으로 하여금 네 명절에만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나 제사의 법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부인의 묘에 대하여는 나라의 백성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묘소를 찾아 새로 꾸미고 향축을 내려 능(陵)에서의 제사 의식과 똑같이 제사를 올리게 하였는데 영월(寧越)과 양주(楊州)의 수령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제사를 지냈으니 이 어찌 성대(聖代)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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