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벽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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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벽 소령
  • 한북신문
  • 승인 2020.06.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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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가슴에 남은 개인적인 추억 하나를 먼저 꺼내본다. 의정부제일시장에서 장사하시던 아버지를 자주 찾아오셔서 함께 시장 마당(지금의 국제빌딩 자리 어디쯤으로 기억한다)에서 냉면을 드시던 친구 분이 계셨다.

안경을 끼시고 목소리가 중후하셨던 그 분은 의정부에서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학원을 운영하신다고 들었는데 마침 대학에 진학하였던 나에게 당신의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함께 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하셨다. 당시에 그분과의 여러 차례 대화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로서는 금기어였던 러시아 말을 가르친다는 것, 아니 러시아 말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와 동갑내기하는 그 분의 따님 이름이 ‘초도’였다. 아니 어떻게 여자 이름을 ‘초도’라고 지을 수 있지?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 이름의 연유를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그 분의 성함은 김종벽, 북한인민군 사이에서 <구월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듣던 전설적인 구월산 반공 유격대장이셨다. 휴전 당시까지도 그가 이끄는 유격부대가 장악하고 있던 황해도 서부의 석도, 웅도, 초도를 휴전협정에 따라 북한에 그냥 넘겨주게 되자 너무나도 한이 맺혀 언젠가는 반드시 이 섬들을 되찾고 고향 황해도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마침 태어난 딸의 이름을 ‘초도’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황해도 구월산 일대 안악, 은률, 송화, 장련 일대에서 봉기하여 대한민국의 보급과 지원 없이 맨손으로 인민군,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3만2000여 명의 유격군, 총 4445회의 적지 침투작전으로 적군 6만9000여 명을 사살했고 무기·탄약·차량·선박을 노획했으며 교량·철도·건물을 파괴하는 한편 추락한 유엔군 소속 공군기 조종사 29명을 구출하고 1만4700여 건의 첩보를 입수했으며 서해 북방 도서를 점령, 작전기지로 활용해 서해에서의 제공권·재해권을 확보하였던 서해 유격군의 조직자이며 전설적인 군인, 그리고 그와 함께 싸워 무명의 순국용사로 산화해 간 구월산의 반공 구국 용사들.

이 유격군을 비공식 지원하던 미군이 1951년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유격부를 두고 34개 유격부대를 편성하면서 백령도기지의 동키 1~15, 20~21부대, 교동도기지의 울팩 1~8부대, 부산·동해기지 9개 부대 등 34개 부대가 공식적으로 대북 침투작전을 전개하였는데도 정확한 전투정보가 없이 비사(秘史)로 묻혀 있다가 197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비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유격군의 활약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 들어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연구팀이 비밀해제 문서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비로소 역사의 표면으로 드러나고 1998년 대한민국의 관련문서가 마침내 공개된다.

이에 힘입어 유격군총연합회는 1992년부터 약 21년간 생존자 개별신고 및 부대원 확인 동의, 각 유격군부대 전우회와 총연합회 심의를 거쳐 전사자 확인 등록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95년 6월 처음으로 2140위를 대전현충원에 봉안했다. 또 2013년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총 5196위의 전사자 위패를 봉안했다. 이 중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전사자는 14명, 유족이 확인된 전사자는 2명뿐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2012년 김종벽 소령에게 그리고 2015년에야 이정숙 유격대원에게 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올해 그들이 묻힌 일반 병사 묘역을 관할하는 대전현충원이 2020년 6월의 현충인물로 두 분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2020년 올해에도 역시 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된 현충일 추모식에 유격군전우회는 초청되지도, 그 이름이 불려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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