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보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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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보충대
  • 한북신문
  • 승인 2020.05.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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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신한대학교 의정부캠퍼스 비스듬이 건너편에는 지금 대단위 아파트가 건립되어 있다. 이제는 웬만한 의정부 토박이 아니면 그 아파트 자리에 ‘101 보충대’라는 부대가 존재하였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게 되었다.

이 자리에 1958년부터 1989년까지 자리 잡고 있었던 이 부대는 1989년에 용현동으로 위치를 이전하면서 부대 명칭을 ‘306 보충대’로 변경하였다가 2014년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새 그 ‘306 보충대’의 존재도 망각되고 있으니 하물며 ‘101 보충대’일까?

이 부대는 성격이 ‘보충대’이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논산훈련소’로 입영되는 장병들 외에 제3야전군사령부 휘하 15개 사단으로 입영하는 <장정>들이 입소하기 전 3박 4일 간 대기하면서 기본 군장을 수령하고 인성, 적성 등 각종 검사를 진행하다가 중부전선 각 사단에 배속되어 각 사단 별 신병교육대에서 소위 말하는 <자대교육>을 받게 마련이었다.

‘101 보충대’와 같은 성격의 <보충대>가 춘천에도 있어 이를 ‘103 보충대’라 하였는데 입영 영장이 ‘101 보충대’로 떨어지면 중부전선지역으로, ‘103 보충대’로 떨어지면 동부전선 산악지대로 배치되는 것을 의미하여 3년 군 복무의 희비가 엇갈리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1952년 동래에서 창설된 이 보충대는 이후 1958년 호원동으로 옮겨와 1989년 용현동으로 옮기고 명칭도 ‘306 부충대’로 바뀌었다가 결국 2014년 부대 자체가 해체 소멸되기까지 연간 약 8만에서 10만 정도의 장정이 거쳐 가는 애환의 장소였다. 입영일인 매주 화요일이면 배웅나온 가족, 애인과 헤어지며 눈물을 뿌리던 곳이며 군 생활의 고달픔이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의 무장공비가 대통령 시해를 목적으로 침투하였을 때 미처 군장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신병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토벌하던 ‘101 보충대’대장이 도봉산 일대의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하는 일이 있었고 이를 전하는 현장의 뉴스를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잔뜩 긴장한 채 듣던 경험이 이제껏 새롭다.

군사도시, 미군주둔지로서의 의정부를 상징하던 이 보충대의 해산은 의정부라는 도시의 성격을 전환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국가 보위를 위하여 청춘을 불사르며 헌신한 많은 장병들의 노고가 나라를 지킨 굳은 방벽이었다면 이를 위하여 터를 제공한 도시 의정부의 기여도 이에 못잖은 몫으로 기려져야 한다.

무작정 군사도사의 이미지를 지우고 경기북부의 중추도시로의 비약을 이야기 한다한들 그 바탕에 깔린 시대의 아픔 역시 이를 살아온 의정부 시민들의 기억 그 이상으로 기념되어야 한다. 의정부 향토 역사에 그 지령을 추가해야 할 이유이다.

‘101 보충대’가 있었던 자리에 작은 표석이라도 세우는 것이 그 헌신에 대한 보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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