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들의 지레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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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들의 지레짐작
  • 한북신문
  • 승인 2020.05.1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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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시민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그 자리를 조선 시대의 왕이나 사대부의 문화로 채우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낸 지점도 흥미롭게 읽힌다. 그렇게 해야 내 고장이 자랑스러운 역사성을 띤다고 여겨서인데 경기도 의정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의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가 들어앉아 군사도시의 성격이 강한 지역이다. 동시에 이곳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직곡산장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면 직곡산장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물적 증거가 없는 셈이다. 그런데 의정부에는 ‘흥선동’ ‘흥선로’ ‘흥선역’처럼 흥선대원군을 강조하는 지명이 많다. 저자는 이런 현상이 “미군 기지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는” 의정부시의 의도일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국민일보 박지훈 기자가 2019년 10월9일 <책과 길>이라는 코너에서 김시덕이 쓴 ‘갈등도시’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책의 본문을 인용하여 쓴 내용이다.

어이가 없다! 직곡산장이 의정부에 있었는지를 ‘조사했더니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고)’ 따라서 이는 의정부시가 ‘미군주둔도시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는’ 의도란다.

<고종실록>을 위시한 해당 사료를 포렌식한 <고종시대사 1집> <고종 11년 10월 20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다.

○ 고종 11년 10월20일(己丑) 앞서 대원군은 서울을 떠나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직곡산장(直谷山莊)에 머물러 있었다. 부사과(副司果) 이휘림(李彙林)은 대원군의 은거(隱居)를 의구(疑懼)하여 전국민심이 불안하므로 왕은 각기동가(刻期動駕)하여 청환(請還)할 것을 요청하다. 이에 교(敎)를 내려 만지패어(滿紙悖語)를 인민이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케 하다.

대원군이 의정부 직곡산장에 머물고 있었다는 이 기사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정치일기(政治日記)> <본조기사(本朝紀事)><卷195> <태황제조(太皇帝朝)> <공차일록(公車日錄)> 동년 10월21일 조에 공히 실려 있는 국가공식 기록이다.

○… 대원군은 북문 밖 삼계동(三溪洞) 산장에 나가 있다가 덕산군 가야산에 있는 부친 남연군 묘소에 성묘한 뒤 양주군 직곡(直谷)산장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 직곡산장터 ;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일대에 있었던 직곡산장(直谷山莊)의 터이다. 가능동(佳陵洞) 702번지 일대로 현재는 빌라가 들어서 있다. <두산백과>

「최화식(崔華植)」 경력, <목서집 (木西集)> <영남 만인소(萬人疏)>에도 해당 기사는 두루 나타난다.

저 ‘아마추어’ 작가는 도대체 무얼 조사했고 무슨 흔적을 확인했다는 것일까? ‘미군주둔은 부끄럽다’라는 나름대로의 진영논리는 주관적인 제몫이라 치자. 무식하면 용감한 것도 어느 정도의 문제지 50만 의정부시민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저리 무모하고 용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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