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임(久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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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임(久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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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0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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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왜란이 끝난 후 일본은 정권이 바뀌어 도쿠가와(德川) 가문이 집권하게 되었고 조일(朝日) 양국은 친선을 회복하게 된다.
일본의 집권자인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 교체될 때마다 유일한 수교국인 조선에 통신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일본에 파견된 이들 조선사신단은 거의 1년 가까이가 소모된 장기 여행을 통하여 일본의 여러 모습을 관찰하는 절호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3(使) 외에도 제술관(製述官), 역관(譯官), 무관(武官), 재인(才人), 화공(畵工) 등 다양한 구성의 사신단은 그들의 고유 업무와 연관하여 일본의 각계 인사들과 다양한 교류를 진행하며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였고 이들이 남긴 방대한 동유록(東遊錄)은 시대를 따라 일본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관점이 어떻게 변화하는 가를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왜란 직후의 무인(武人) 사회의 살벌한 시대상이 도쿠가와 막부(幕府) 정권이 깊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문화(文化)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조선의 사신들이 지속적인 의문을 가지는 것은 일본 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엄청난 도시의 번화함, 그리고 정치적 안정의 원인이었다.
무사(武士), 농민(農民), 기술자(技術者), 상인(商人), 승려(僧侶)이라는 기본 사회 조직의 말단에도 들지 못하는 문사(文士)들과 따라서 문화(文化)의 혜택이 없는 그들이 이루어가는 번영의 이유와 원인을 자신들의 성리학(性理學)적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 데 그들의 사고(思考)적 혼란이 있었다. 더군다나 황실, 쇼군, 다이묘, 무사의 각 집단이 철저히 세습되어 때로 조선사신을 영접하는 중직 조차도 유충(幼沖)하고 무식(無識)하여 대화의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더더욱 그리하였다.
점차 시대가 내려오고 일본 사회의 인정이 더 깊숙이 진행된 상황에서 그들 조선사신이 발견해 낸 사항은 정권의 핵심 그룹인 주로(中老)와 부교(奉行)가 선발되는 선출직이며 지방의 경우 역시 서경(西京)인 교오토(京都)와 상경(商京)인 오사카(大板)의 행정관이 인재 가운데 선발되는 선출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들 실무 선출직들은 아주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한 거의 평생을 그 자리를 유지하며 전문성을 강화해 간다는 사실이었다. 조선 사신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구임(久任)’이라 부르며 조선과는 다른 이 구임(久任)’의 효용성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의 경우 지방관의 임기인 고만(考滿)’이 겨우 2년이며 그나마 그 고감을 다 채우는 지방관은 아주 드물어 양주 목사의 경우 500년 어간에 역임자가 600명에 이르러 1인당 1년을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관의 경우는 이와 같은 체임(遞任)이 더욱 심하여 각 관청에서의 재임이 불과 수개월에 불과했다. 따라서 관리들에게 전문성과 책임성을 요구할 수 없었고 행정의 실질적인 담당자인 아전들을 성심껏 다스려낼 수도 없었다.
사신들이 자신의 기행문에서 저마다 이 구임(久任)’의 효율성을 거듭 지적하는 것은 그래서 였다.
현재 우리의 지방 자치 행정 역시 순회 근무를 기본으로 한다. 업무의 중요성이나 다양한 경험의 축적, 때로는 부정부패의 방지를 위한 고육책인 듯싶다. 그러나 불과 1년여의 시차로 교체되는 업무기간이 가지는 비효율과 비전문성, 복지부동적 답습의 오류가 반복되는 상황을 언제까지 묵과할 것인가? 무언가 새로운 도전과 시도가 필요하지는 않은가? 심각하게 성찰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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