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상태바
태극기
  • 관리자
  • 승인 2019.11.23 0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태극기가 우리나라의 국가 기표(旗標)로 공식 등장한 데 관하여는 두 가지의 학설이 있다. 하나는 18825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통역관 이응준이 만들어 회담장에 게시하였다는 설과 188289일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으로 가는 배에 게시하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시기와 장소는 다르지만 이 두 개의 사용례는 일종의 임시방편이었고 태극기가 국왕의 재가를 얻어 공식 국기로 확정된 것은 박영효가 822일 태극기 소본(小本)과 함께 국기제정사실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보고하여 1883127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올린 장계에 따라 국왕의 재가를 얻어 팔도사도(八道四都)에 행회(行會)함으로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현행 19491015일 대한민국이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확정하여 현재에 이른다. 북한 정권 역시도 19487월까지는 이 태극기를 자신들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근대 국가사이에 조약이 체결되면서 체결 당사국의 국기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는데 조선은 국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청()의 주일 외교관 황쥰셴[黃遵憲]은 조선에 대하여 당시 청이 사용하던 황룡기를 약간 변형하여 국기로 사용하도록 권고하였고 이를 계기로 청의 황룡기를 변형하는 여러 방식이 논의 되다가 4()청룡기를 사용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었으나 다시 반홍반흑(半紅半黑)의 태극 주위에 8도를 상징하는 8()를 배치하는 도식으로 변경되었고 이를 다시 박영효(朴泳孝)가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에 그 주위에 4()를 배치하는 현재의 도식으로 확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 논의는 그 자체가 청의 종속적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주(自主)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었고 당연히 청의 강력한 견제와 압력이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백지태극4(白地太極四卦)의 깃발이 가지는 도상(圖像)적 의미가 무엇이며 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를 제정하였는가. 이 기보다는 이 깃발아래 조국을 찾겠다는 수많은 애국 열사들이 피 흘리며 죽어갔고 우리의 조국을 공산침략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하여 기꺼이 피 흘린 위대한 애국 용사들의 주검 위에 이 깃발이 덮였으며 나라의 위상을 높인 겨레의 대표들이 따내는 영예로운 메달의 수여식전마다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깃발이 하늘 높이 게양되었다는 그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이 깃발을 안고 이 깃발 아래, 더불어 전진하고 발전하며 성취해 왔던 것이다.
근래애국가를 작곡한 이의 친일 행적이 의심된다는 이유로애국가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친일 정치가 박영효(朴永曉)가 제작에 깊이 간여한 태극기도 폐지를 검토하여야 하는가?
단 한 번도 하늘 높이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며 가슴 뜨거워지거나 눈물 흘려 본 적 없는 이들, 그러면서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 지금에 이른 애국가와 태극기를 향해 가당치 않은 이념의 잣대로 고루한 시비를 거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