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과 조선의용군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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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과 조선의용군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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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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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논설위원·여행작가

서훈을 주자는 의견이 거론될 정도로 요즘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높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그가 의열단장으로 활약하던 시기인 1922년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써주었고 이후 나석주의 폭탄 투척 사건 등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하였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0년 김구 주석이 각 독립군을 광복군에 통합하려 할 때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이 응했다가 공산주의 청년의용대의 반대를 이유로 거부했으며 또한 김구는 독립운동단체가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이란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해서이고 이 때문에 오히려 임시정부가 힘을 얻게 되었다고 적었다.
1942년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광복군에 합류했으나 나머지 대원 80%는 팔로군 출신 무정이 주축이 되어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마오쩌둥의 장개석 군대토벌에 투입된다.
1930년대 국민당 군대의 공격으로 궤멸 위기에 처했던 마오쩌둥은 국공합작 이후 살아나 일제가 패망하자 장개석군대와 내전을 벌인다. 이때 김원봉 지휘하에 있다가 이탈한 조선의용군은 마오쩌둥 편에 서서 만주 지역의 장개석 군대와 싸웠다. 1949101일 중국 통일 전후 마오쩌둥은 전투과정에서 증강된 조선 의용군을 북한에 보내고 이듬해 10월 한국동란 때 참전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기 월북한 김원봉의 행적이다.
어느 의원이 낙동강 다부동에서 북한군 공격을 막아내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했던 한국동란의 영웅을 창씨개명과 간도특설대 근무경력을 이유삼아 독립군을 사살했다며 업적을 폄훼하고 있다. 늘 그렇듯 이것은 내 연령대 전후인 이들의 사고방식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창씨개명(1939)은 왜정말기 국내에 거주해 일제치하에서 살아야 했던 전 조선인에게 강요된 것으로 당시 학교 등 교육기관과 군적 및 징용자 명부, 면사무소의 공문서 등에 자신의 부친 및 조부의 일본식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2004년 오키나와에 갔을 때 참배한 한국인 위령탑 평화의 초(비석)에 새겨진 한국인 전몰자 명단이 건립 당시 정부가 창씨 개명된 이름을 일일이 찾아 한국이름으로 각명한 것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 대장으로 구성된 만주군 간도 특설대는 한중연합군인 항일련군과 싸웠다.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일제의 토벌로 소련으로 쫓겨나 88여단으로 개편되어 후에 6.25전쟁을 일으키는 주역이 되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싸운 분을 왜정말 강요된 창씨개명과 6.25전쟁의 주범이 소속된 항일련군을 토벌했다는 이유로 일제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약산 김원봉이 일제와 싸운 건 사실이나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주는 것은 지금 여건에 맞지 않는다. 그가 창설한 조선의용대()는 북한인민군의 모체가 되었고 6.25전쟁 때 무정, 김창덕(5사단장), 방호산(6사단장) 등은 직접 전투에 나섰는데 특히 방호산 군대는 충청, 전라지역을 점령하여 인민재판으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따라서 서훈 수여는 통일 후 그의 행적을 확인한 다음 고려해 봐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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