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자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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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자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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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1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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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논설위원·여행작가

사회주의 활동 경력 때문에 부친의 독립유공자 선정 논란이 있는 어느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생각난다. 니들 아버지는 그때 뭐하셨는지.’ 그렇다면 이 말에 답해 주어야 한다.
나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1938년 평양 광성중학교(5년제)에 입학하여 1943년에 졸업하였다. 그러나 왜정 말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의 반격으로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3년 도조 히데키가 실시한 징병제에 의해 1945년 초 징집되었다.

이것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의 지원병제와 달리 그 연령대의 전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오늘날의 징병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오키나와전에 투입되기 위해 평양 보병 제1보충대에서 훈련을 받던 도중 아버지는 19454. 야간에 하수구를 통해 훈련소를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는 친척에게 부탁해 숨겨주었고 4개월 뒤 8. 15 해방을 맞았다. 광복 후 아버지는 모교인 영유보통학교에서 몇 달간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이듬해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1948년 여름 인민군 장교로 근무하던 한 동창으로부터 곧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다는 정보를 듣고 월남을 결심하게 된다.
월남 후 1949년 준교사 시험에 합격하여 우이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3개월 간 숨어 지냈다가 서울 수복 후 복직하였다. 하지만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29세에 대한민국 군대에 징집되어 1952~1956년까지 49개월간 홍천 통신대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이처럼 나의 아버지는 1924년 갑자생으로 甲子, 乙丑생은 군대에 가야 한다는 말대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던 왜정 말과 한국동란 기간에 2차례 징집되어 6.25전쟁 때 대한민국을 지키기위해 싸웠다.(2009년 참전 유공자 등록) 그리고 자신의 꿈은 나의 형이 의사가 되도록 뒷바라지 하여 이루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품 중에 페렌바크의 실록 한국전쟁(This kind of War). 1965이란 책이 있다. 지난 해 매티스 전 미국 국방장관이 소개해 알려졌는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라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이 책이 대학 시절 6. 25가 북침 또는 남침유도설이라고 한 부룩스 커밍스의 궤변과 오류를 바로 잡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동란은 김일성이 스탈린을 찾아가 부탁하여 탱크, 전투기 등 지원을 허락받고 마오쩌둥이 팔로군출신 조선인 병력 수 만명을 지원해 (인민군 4, 6사단 등 편입) 주어 일으킨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미군과 UN군이 참전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했고 중공군은 그 해 10월 참전하여 우리의 통일 기회를 무산시켰다.
미군과 UN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김정은 체제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반대로 중공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통일되어 이념 갈등을 덜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은인이자 동맹인 미국에 대해선 할 말을 하는데 상 감령 (필자는 이곳 6사단에서 현역 군복무를 하였다.) 전투를 미화하는 한국분단의 원흉 중국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동란이 처음부터 중국이 개입한 전쟁임을 알지 못한 채 잊혀 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615일 북한어선이 동해상 NLL을 넘어온 것도 모를 정도로 우리 군의 경계 태세와 감시가 허술해졌다. 이는 곧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이라는 오판의 기회를 줄 수 있다. 따라서 수많은 인명피해와 주거, 산업시설 등 전 국토를 초토화시킨 채 잊혀져간 6.25전쟁을 상기하고 국민 모두 투철한 안보의식을 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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