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훈삭제(僞勳削除)
상태바
위훈삭제(僞勳削除)
  • 관리자
  • 승인 2019.06.21 05: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조선 전기의 정치를 주도해 간 세력은 훈구파였다. 훈구파란 조선 건국에 기여한 주체세력이었던 개국공신에서 비롯되어 이후 조선전기의 역사의 숨 가쁜 고비마다 집권자의 입지에 기여한 공로로 책봉된 각종 공신들과 그 후손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번 공신에 책훈되면 권력의 중심에 참가할 뿐 아니라 공신전이라고도 하는 대규모의 사패지를 소유하게 되고 심지어 이 사패지는 공신 적장(嫡長)에게 세습 상속되는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누리며 각종 사법 특권까지 향유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과거를 통하여 입사한 신진들은 같은 직급, 심지어는 낮은 직급의 훈구 자제들에게도 차별대우를 받는 상황에서 결국은 훈구 대 사림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게 되어 마침내 이 갈등이 사화로 확대되었다.
연산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실제로 반정 과정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한 적이 없었고 그 자신의 성품도 정치적으로 강인하지 않은 착한 성정이었기에 자연히 반정의 실질 진행자들이었던 공신그룹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심지어는 조강지처 단경왕후를 공신 그룹의 압력으로 왕비로 책봉한 지 불과 8일 만에 축출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 상황은 당시 공신 그룹의 위세가 어떠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중종이 이들 공신 그룹을 견제할 목적으로 중용한 인물이 바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였다. 그는 도의정치를 표명하면서 과격하다 싶을 정도의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기존의 학풍을 비판하며 성리학을 국가의 유일 이데올로기로 확립하고자 하였고 과거제도에 기존 훈구파의 사적 특권이 개입하는 것을 막고자 현량과라는 사림 추천제로 개혁세력의 인적 입지를 확대하고자 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향약을 실시하여 사림의 지방적 토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급진 개혁은 많은 저항을 불러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위훈(僞勳)을 삭제하려는 것이었다. <위훈(僞勳)> 즉 거짓 공훈을 심사하여 공로 없이 공신(功臣)의 특권에 참여한 자, 특히 기존 공신의 가족 친척을 가려 이를 삭제하겠다는 것이었다.
1519(중종 14) 조광조는 성희안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공신이 되었고, 유자광은 친척들의 권세를 위해 반정에 참여했는데 이는 소인들의 반정정신이라고 비난했다. 따라서 반정공신 2, 3등 가운데 심한 것을 개정하고, 450여 명은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제는 반정의 공로를 따져 공로 없이 공신의 특권을 차지한 거짓 공로자들을 징계해야 한다면 이 조항에 첫 번째로 걸리는 사람이 바로 임금인 중종 자신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는 처형되고 그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요즘 민주화운동의 유공자 명단과 공훈 사유를 공개하라는 일부의 주장을 두고 찬반 의견이 대두하고 있다. 경위를 당당하고 상세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면 자칫 이 또한 어느 한 편에게는 조광조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