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애양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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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애양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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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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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여수의 애양원은 1911년 남장로교회의 선교사 윌슨이 광주에 설립한 병원 제중원에서 시작하였다. 그가 병원에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자 지역사회의 맹렬한 배척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1928600여명의 환자를 이송하여 한촌이던 여수 현지로 이동하게 된다.
19397월 이 한센병 치료기관의 부속교회에 부임한 손양원 목사는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에 투철한 목회자로 일제의 강압적인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다가 1940년 투옥되었다가 1946년 다시 애양원교회에 부임하면서 참혹한 참사에 부딪히게 된다.

당시 손목사의 장남인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재학하며 순천에서 여동생 동희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510일 대한민국 제헌의원을 선거하는 전국 총선거에 반대하는 일부 제주도민의 적극적인 저항이 발생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여수 주둔 14연대의 일부 부대에 제주도로의 진압 출동이 하달되었고 부대 안에 침투하여 있던 좌익세력에 주도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 일대가 그들에게 장악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상황에 저항군에 동조하는 여수, 순천 일대의 좌익시민과 학생들이 사태에 가담하고 그들은 평상시 자신들과 사상적 지향이 다른 시민, 학생들을 인민재판의 형태로 처형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역시 기독학생회의 지도성원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하게 처형되고 만다. 다행이 전날 소풍에 다녀온 여동생 동희는 소풍이 끝나고 부모님이 계시는 여수 애양원에 머물렀기에 참화를 면하게 된다.
여수, 순천을 다시 국군이 장악하자 좌익에 의하여 가족을 잃은 공무원, 경찰, 군인 가족들은 이제 체포된 좌익들을 처형하는 상황이 되었고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을 처형한 당사자도 체포되어 처분을 기다리게 된다. 이에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 학생을 적극 구명하여 살려내고 나아가 자신의 아들로 삼게 된다. 이후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게 된다.
어린 나이에 순교의 길을 걸은 두 아들의 장례를 집전하면서 손양원 목사가 했던 그 유명한 설교 <아들 동인, 동신이의 죽음에 감사하는 열 가지 이유>는 지금도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간절한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이민족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고 사상적 이해가 깊으면 얼마나 깊었던 것일까?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때려 박으며 까지 싸워야 할 간절한 신념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수 순천 반란사건>에서 이제는 사건의 명칭이 <여수, 순천 11, 19사건>이라 바뀌었고 당시 우익 및 진압군에게 <적법한 절차>없이 처형당한 사람들의 재심이 시작된다는 소식이다.
이제는 그렇게 해야 할 때가 되었고 너무나 오래 원한과 억울함을 참고 살아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린 나이에 순교하여 애양원에 묻힌 손동인, 손동신 형제와 결국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하여 총살 처형된 한센인의 영원한 친구 손양원 목사의 무덤 앞에서 조용히 그러나 진지하게 묻게 된다. 지금의 이 시각은 과연 공정하고 균형적인가? 과연 맞는가? 너무 일방적인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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