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 천년 전 한민족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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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 천년 전 한민족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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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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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기 논설위원·신한대 공공행정학과 교수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의 해다. 언론의 많은 홍보 덕에 국민들이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3.1운동을 통한 한민족의 힘을 인식하는 데는 다소 아쉽다. 연인원 200만 명이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만 알려지는 듯하다.
그런데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한민족의 저력은 놀랍기만 하다. 그 시절, 수만 개의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기까지 소요기간은 최소한 두세 달이 걸렸을 것이다. 제작된 태극기를 전국 주요 지역에 배포하는 기간만 해도 최소 한 달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3.1운동 준비 당시, 일본 헌병과 그 프락치까지는 실로 수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번뜩이는 감시망에도 단 한 명도 걸려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배신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3.1운동은 한마디로 완벽한 준비와 엄청난 규모의 거사였던 것이다. 일본이 놀란 것은 만세운동에 참가한 규모만이 아니라 그 준비과정에서 보여준 조선인의 단결력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더 이상 총칼로 협박 통치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은 문화통치라는 다소 유화적인 식민통치방식을 들고 나왔다.
정확히 천 년 전인 1019년에도 한민족의 힘을 보여준 일이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는 신흥 최강국인 요나라와 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가 삼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자신의 힘을 믿고 송나라를 집어삼킬 듯한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전에 먼저 송나라와 우호 관계인 고려를 장악하려 침공하였다.

배후를 확실하게 제압하려는 속셈이었다. 무려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쳐들어오는데, 특히 세 번째 침공은 요나라 황제 친위대까지 동원한 그야말로 최정예 부대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전의 소극적인 전법을 버리고 역시 전면전으로 맞섰다. 그 선봉에는 강감찬이 있었다.
고려는 강동 6주에서부터 요나라군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요나라 군대는 막강하였다. 온갖 고려군의 방해와 기습에도 불구하고 고려 수도 개경까지 진격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요나라 군대는 꺾이기 시작했다. 고려는 민관군이 총동원하여 성 밖의 우물은 모두 독을 타서 메꾸고 곡식은 모조리 베어내고, 가축은 모두 잡아 성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른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펼친 것이었다. 용맹하기로 소문난 요나라 장수 소배압도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요나라군은 뜻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귀주 벌판에서 고려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군 상원수인 강감찬은 성을 지키는 전술을 버리고 과감하게 들판으로 나와 진을 첬다. 결국 고려군 20만 명과 요나라군 10만 명은 그곳에서 처절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그때가 10192월이었다.
결과는 고려군의 완승이었다. 살아 돌아간 요나라군 숫자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이후 다시는 요나라가 고려를 침공하는 일이 없었고, 동아시아 3국은 평화체제로 돌입하였다. 귀주대첩 후 약 백 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고려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듯했다. 송나라도 요나라도 고려를 우대하였고, 고려 사신들은 맘껏 국력을 실감하였다. 오죽하면 송나라 관리 소동파는 고려 사신단이 송나라 재정을 바닥낸다고 통탄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과 천년 전의 한민족은 그 기세를 열방에 널리 알렸다. 3.1운동은 중국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귀주대첩은 고려가 중국대륙에 맞서 갑()의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단순히 역사의 한 장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에 사는 우리는 호쾌했던 과거를 웅지로 변화시켜 더욱 힘차고 역동적인 미래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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