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우 열사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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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우 열사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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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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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주간 홍정덕(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백두산과 고구려 역사답사를 겸한 중국 동북여행은 흔히 먼저 백두산을 탐승하고 이어 고구려의 수도였던 압록강가의 집안, 즉 옛 국내성으로 향하게 되는 데 대부분의 경우 통화(通化)에서 중간 1()을 하게 된다. 바로 그 통화에 양정우 열사가 잠든 열사릉이 있다.
양정우(楊靖宇)는 중국의 항일열사로 동북황일연군의 총사령으로 신출귀몰하는 작전으로 만주군과 일본 관동군을 여러 차례 절망적인 패전으로 몰고 가는 명장이었다. 그가 인솔하는 동북항일연군 안에는 당시 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던 수많은 조선독립군이 망라되어 있었고, 이로서 그는 중국의 항일지도자이자 동시에 조선 독립무장세력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0년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만주지배가 강화되고 일본에 붙어 그들의 지원을 받고 지시를 따르는 친일 중국인들 이른바 한간(漢奸) 무장세력 및 일부 친일 조선 무장 세력을 앞세운 일제 관동군의 무장공세에 점차 세력을 잃고 산간 밀림으로 쫓기다가 마침내 1940215일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일본군은 양정우의 시신에서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梟示)하고 이른바 양정우 토벌에 공을 세운 자들을 표창하며 이를 기념하는 만세유방(萬世遺芳) 비석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통화시에 위치한 양정우열사릉은 바로 그 양정우를 모신 무덤이다 명칭부터 <()>이라 하였는데 과연 왜만한 왕의 무덤에 못지않은 대단한 규모이다.
나는 고구려 답사길 마다 이 능원에 들러 갈때마다 새로워지는 능원의 모습은 물론 경건한 마음으로 이 능원을 참배하는 수많은 시민, 그리고 교사에 인솔되어 온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했다.
이 능원에서 특히 감회로운 곳은 양정우 열사의 신도비였다. 비석의 장대한 규모도 그렇거니와 특히 마음에 남는 것은 그 비석 옆에 동강난 채 버려지듯 남아있는 또 다른 비석 때문이었는데 이 토막난 채 양정우 기념비 아래 일부러 방치해 놓은 이 비석조각은 바로 양정우 열사를 소위 토벌한 공으로 매국노 한간(漢奸)들을 위해 일제가 세워 준 만세유방(萬世遺芳) 비석이기 때문이다. 늠름히 서있는 애국 순국열사의 비 아래 동강난 채 전시되어 있는 매국노들의 비석! 얼마나 강렬한 교훈으로 가슴에 부딛혀 오는지 내 마음이 얼얼하곤 하였다.
하얼빈에는 양정우를 기념하는 정우가라는 거리가 있고 통화현 바로 옆에는 정우현이라는 행정지역이 있다. 그의 애국 충절은 이렇게 관념이 아닌 실재로 중국인들의 삶과 생각에 사무치고 있었다.
애국자들을 다시 돌아보는 삼일혁명 백주년의 오늘 우리는 정말 제대로 애국자들의 붉은 정성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일제가 어거지로 망쳐버린 지명, 행정지역명에 이제는 우리도 관순면, 백범시, 회영구, 청천초등학교, 봉길중학교가 이름으로 지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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