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살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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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살았더라면
  • 관리자
  • 승인 2019.03.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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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일 논설위원·신한대학교 교수

빛고을은 순수 우리말로 광주를 뜻한다. 광주는 한반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온화한 기후와 기름진 평야를 두루 갖춘 천혜의 고장이며 호남지방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사회역사적으로 보면 동학농민혁명에서 5.18 광주민주화 운동까지 반봉건, 자주독립 운동의 선두에 있었으며 광주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민주화 투쟁의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매김한 곳이다. 쉽지 않고 고통스러웠던 오랜 과정을 겪어온 광주의 치유가 최근 극우 정치인과 일부 극우 논객들에 의해 다시 헤집어 지고 있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을 두고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이 들끓고 있다. 광주의 상처를 도지게 하고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5.18 진상규명 대국민 공청회-북한군 개입 여부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국회공청회에서 이종명 의원은 “5.18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됐다. 논리적으로 5.18이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었음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김진태 의원은 영상메시지에서 “5.18문제만큼은 우파가 결코 물러서면 안 된다고 말했다. 김순례 의원은 종북좌파들이 판을 치면서 5·18 유공자란 괴물 집단을 만들어내 우리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5.18 민주화운동과 유공자들을 폭동내지는 비양심적 무리들이 끼여 있는 비정상 집단으로 매도하고 괴물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폄훼하고 왜곡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4당은 세의원을 제명 조치한다고 난리지만 제명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의 난리는 거의 언제나 흐지부지 잊혀지는 게 일반이다. 그들은 국회의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청와대 뒤편 성북동에서 나고 자랐다. 뒤에 북한산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부자들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경계를 이루며 살았다. 고급관리나 부자들이 이용하는 고급 요정도 있었다. 담장 밖에서 도토리를 줍고 축구공을 굴리면서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는 게 소원인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어쨌든 필자의 어린 시절은 눈썰매와 축구로 즐거웠다. 서울대가 연건동에 있을 당시 시위를 하는 광경을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긴 하였지만 총검을 찬 군인을 본 것은 청와대를 지키는 멋진 군인들뿐이었다. 국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는 광경은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다. 통상의 사람들은 민간인이 경찰이나 군인들에 의해 곤봉으로 맞는 장면만 보아도 거의 평생 그 광경을 잊지 못한다. 더군다나 이유가 어떻든 간에 군인이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쏘고 총에 맞은 것을 보았다면 아마 그 사람은 그 장면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이다.
805월 광주에서는 193명의 사망자와 376명의 후유증 사망자, 63명의 행불자, 부상 및 구속, 고문피해자가 각각 3139명과 1589명이 발생하였다. 그 광경을 목격하였거나 전해 들었던 사람들의 고통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27명의 군경도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안타깝게 희생되었고 그 가족들도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았을 것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왜곡된 국가주의 추종자들과 그들의 권력욕구가 빗어낸 산물이다. 이 기형적 산물은 오랜 시간 광주에 희생과 침묵을 강요하였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온갖 수모를 주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만일 필자가 광주에 살았더라면 어떤 생각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을지, 마음이 참담하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지금껏 광주시민들에게는 슬픔과 고통의 역사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이제는 슬픔과 고통을 넘어 자긍심으로 승화되어야 하고 반듯한 역사로 남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상처를 들춰내고 헤집고 재뿌리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다. 진실인가, 무지인가, 객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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