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의 땅이름-71)오리골(鳧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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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땅이름-71)오리골(鳧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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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1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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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논설위원·신한대 중앙도서관장
낙양동에 있는 낙양상가에서 소로를 따라 약 1000미터 정도가면 오리골 마을이 나온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5리나 10리마다 표목(標木)이 세워져서 5리에 표목이 세워지면 보통 오리골(五里谷)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곳이 특이하게 오리골(鳧溪)로 변한 데는 이곳에 악곡(樂谷) 진익한(陳翼漢;1677~1738)이 쓴 鳧溪부석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 암반 상반에 鳧溪라고 음각되어있다. 글자의 크기는 가로 26센티, 세로 35센티미터이다. 현재 자연 암반은 거의 대부분이 흙으로 덮혀 있고, 두 글자가 새겨진 일부분만 밖으로 노출되어있다.

진익한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진씨(陳氏)는 중국 송()나라 복주(福州) 사람인 진수(陳秀)가 우윤(右尹) 벼슬을 지내다가 요금의 난을 피해 고려에 건너와 여양현 아래에 정착, 세거한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다.

시조 진총후(陳寵厚)여양진씨대동보(驪陽陳氏大同譜)에 의하면 고려 예종 때 호분위대장군(虎賁衛大將軍)을 역임했으며, 1126(인종 4)에는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오르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여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여주 진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13, 무과 4, 사마시 24명 등 총 4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진익한의 호는 악곡(樂谷), 와와자(蝸窩子)로 의정부 민락동에서 진홍수(陳洪疇)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만학인 34세 때 1710(숙종 36)에 생원(生員)과 진사시(進士試) 양과에 동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38세인 1714(숙종 40)에 증광시에 을과 5등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예조 좌랑, 병조정랑, 춘추관 정랑을 지냈다.

한때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으나 1727(경종 1)에 제수되어 강진현감 용강현령, 성균관 직강을 역임하였다. 그의 행장과 시문을 실은 악곡집(樂谷集)과 악곡유고(樂谷遺稿)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낙양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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