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의 인(宋襄之仁)
상태바
송양의 인(宋襄之仁)
  • 관리자
  • 승인 2017.09.30 1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 나라 양왕(襄王) 14(기원 전638) ()나라의 양공(襄公)이 정()나라를 치자 초()나라가 정나라에 원군을 보냈다. 초군이 홍수(泓水)를 건너기 시작했을 때 재상 목이(目夷)가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적이 강을 건너고 있는 도중인데 이를 공격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며 이를 거부했다.

초군이 강을 다 건너 아직 진을 치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목이가 초군을 공격하자고 건의하자 양공은 적이 아직 진을 정비하지 않았는데 이를 공격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다시 거부하고 말았다.

이윽고 대오를 정비한 초군(楚軍)의 총 공격에 송은 대패하여 결국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송나라 양공의 어짐>이라 하여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았다.

1600년 세키가와라(關原) 싸움에서 이긴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는 도요토미가의 상속자 히데요리(秀賴)를 압박하여 거대한 재부를 기울여 도요쿠니(豊國) 신사를 짓게 하고 그 신사에 새로 봉안한 종의 명문(銘文)을 트집 잡아 1614년 오사카성으로 쳐들어간다.

도요토미의 가신들은 천하의 난공불락이었던 오사카성에 웅거하여 결사의 항전에 들어가고 도쿠가와 군은 오사카성의 방어시설, 특히 3중의 깊고 넓은 해자(垓子)에 막혀 쉽게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양군의 휴전과 공존을 제안하면서 도요토미(豊臣) 가문의 보존을 약속하는 대신 평화의 보장으로 오사카성의 해자를 메꾸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를 오사카 측이 받아 들이자마자 군대를 동원하여 인근 민가를 헐어다가 해자를 메꾸고 해자가 메꾸어진 후 트집을 잡아 다시 성을 공격한다. 1615년 이른바 오사카성의 여름전투이다. 그리고 결사적인 항전에 실패한 도요토미 일가와 가신들은 모두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전쟁에 이긴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전쟁 중에 적장의 약속을 믿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
19389월 뮌헨에서 히틀러와 면담하고 돌아온 영국수상 체임벌린은 히드로우 공항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어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히틀러와의 면담에서 히틀러가 독일주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독일과의 합병을 요구하고 있는 쥬테덴, 즉 체코만 점령하게 해주면 이후 절대로 유럽에서의 영토적 요구나 이를 관철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지 않겠노라고 약속하는 평화협정, 즉 뮌헨협정 합의문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협정을 깨고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대전이 시작된다.

북한이 또 대륙간 탄도탄을 쏘았다. 강력한 국제연합의 제재가 나온 지 불과 3일 만이다. 이제 우리는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그리고 수천문의 장사정포와 압도적 병력으로 무장한 채 노골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북과 맞서 있다.

대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여전히 인도적 지원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킬 준비가 안된 채 적과 협상하고 타협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가르쳐 준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