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의 땅이름 -59)석천동(石泉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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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땅이름 -59)석천동(石泉洞)
  • 김추윤
  • 승인 2017.05.1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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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논설위원·신한대 중앙도서관장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 가면 그 유명한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서계 박세당(1629-1703)이 살았던 석천동(石泉洞)이 있다. 현재도 이곳에 그가 살았던 고택이 잘 보존되어있다.


박세당의 호는 잠수, 서계(西溪)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하곡 박정(1596-1632)이다. 4살 때 부친상을 당한 박세당은 형들에게서 교육을 받다가 13세가 되어서야 고모부 정사무(鄭思武)에게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다. 32세 때인 1660(현종 원년) 중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당쟁에 혐오감을 느낀 박세당은 166810여년 간의 관직을 접고 양주 석천동(石泉洞; 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밑)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박세당은 아버지 박정이 인조반정으로 공을 인정받아 정사공신이 되면서 받은 수락산일대의 사패지를 38세때 부인의 묘를 이곳 장자곡(長子谷)에 쓰면서 눈여겨 봐둔 석천동에 40세에 들어와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사신으로 중국 연경을 다녀올 때와 통진현감, 효종의 영릉천장도감 도청으로 나간 때를 제외하고는 75세 사망할 때까지 의정부시 장암동 석천동에서 살았다.


당시 수락산 동쪽 계곡의 빼어난 자연을 사랑하여 이곳을 석천이라 이름 짓고 언젠가 거처를 옮겨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수락산 줄기 아래에 위치한 석천동은 앞쪽에 도봉산이 우뚝 솟아 장쾌한 자연경관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들 박태보는 1677(숙종3)에 알성문과에서 아버지처럼 장원급제한 수재로 홍문관 교리와 파주목사,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했으나 1689년 기사환국 당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고문으로 진도로 유배 가던 중 노량진에서 사망했다. 사위로는 유명한 남구만(1629-1711)이 있다.

박세당은 자신이 직접지은 묘표에서 석천동 당시의 삶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물가에 집을 지었으나 울타리는 없고 거기 복숭아, 살구, , 밤나무를 심었으며 집주위를 둘러 오이를 가꾸고 논을 풀고 나무를 해다 팔아 생계를 삼았다. 농사철이 되면 들에 나가 호미를 들고 가래 멘자들과 어울려 지냈다’. 박세당은 석천동에 관란정과 괴산정 정자 두 채를 짓고 제자들과 학문을 익혔다. 조정에서 관직을 내려 보내도 그는 번번이 응하지 않았다.

그의 <석천동기(石泉洞記)>에 의하면, ‘석천동은 잠수(박세당)가 사는 곳이다. 잠수가 조정에서 시종으로 벼슬을 한지 10여년이었는데 어느 날 병으로 물러나 선부봉 아래에 은거하고는 사는 곳의 샘물을 석천(石泉)이라 이름하고 이어 그 골짜기를 석천동(石泉洞)이라 하였다.


이 지역이 도성의 동쪽에 해당되기에 또 그 산등성이를 동강(東崗)이라하고, 시내를 동계(東溪)라 하였으며, 또 이곳에 잠수가 산다하여 그 물을 잠수(潛水)라 하고 언덕을 잠구(潛丘)라 하였다고 지명유래에 대해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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