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의 땅이름-54) 봉화봉(烽火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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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땅이름-54) 봉화봉(烽火峯)
  • 김추윤
  • 승인 2017.03.0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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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신한대 중앙도서관장·논설위원

의정부시 낙양동에는 약 130미터 정도의 봉화봉이란 야산이 있다. 양지편 마을 뒤의 봉우리로 예전에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피웠던 봉수대가 정상에 있어 봉화봉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정상에서 봉수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산의 규모도 작고, 도심에 있어서 예전의 흔적이 없어진 것 같다. 봉화대란 봉화(烽火)를 들 수 있게 설비하여 놓은 장소이다.

봉화대는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를 올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는 제도이다. 봉화는 밤에 피우는 횃불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낮에 올리는 연기까지도 포함해서 흔히 봉화라 통칭하였으므로 봉수대의 이름도 봉화의 ()’자를 따서 봉대(烽臺), 봉화대(烽火臺), 봉확대(烽臺), 연대(烟臺)로 다양하게 불렀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양주목 봉수 조에 보면, 양주 관내에는 한이산, 아차산 봉수 2개의 봉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차산 봉수는 망우리면에 있는데, 북쪽으로 한이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남쪽으로 15리에 있는 목면산 봉수에 신호를 보낸다. 감관과 봉군의 숫자는, 군기등은 한이산 봉수와 같다.


한이산 봉수는 건천면에 있는데, 북쪽으로 20리인 포천 광산(廣山)봉수의 신호를 받아 남쪽으로 30리에 있는 아차산(峨嵯山) 봉수에 신호를 보낸다. 감관(監官) 1, 봉군(烽軍) 25, 보인(保人) 50명과 군기(軍器) 등의 물건이 있다.

봉수 제도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의종 때 확립되었으므로 봉수대의 시설도 그 때 확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22(세종4)에 각 도의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1438(세종20)에 완비하였는데, 연해나 변방에 설치된 각 연변봉수에는 영조척으로 높이 25, 둘레 70척의 봉수대를 쌓고, 그 아래에 깊이·너비 각 10척의 참호(塹壕)를 팠다.

봉수대 위에는 임시로 집을 지어 각종 병기와 생활용품을 준비해 놓게 하고 봉수군(봉화군·봉졸·봉군)과 봉수군을 통솔하고 감시하는 오장(伍長:오원)이 생활하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는 목멱산 봉수(한양 남산) 사이에 설치된 내지봉수에는 연기를 올리는 봉수대는 쌓지 않고 아궁이(연조)만 쌓았으나 적이 침범하기 쉬운 곳은 봉수대를 쌓고, 맹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 둘레에 담을 쌓은 곳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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