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의 땅이름- 46)둔배미(屯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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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땅이름- 46)둔배미(屯夜)
  • 김추윤
  • 승인 2016.10.2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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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신한대 중앙도서관장

의정부시 신곡동에 가면 둔매미 마을이 있다. 둔매미는 둔과 매미의 합성어이다. 둔을 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오기이며 원래 이 맞는다. 둔은 역둔토(驛屯土)의 준말이다. 배미는 농토를 계량하는 단위로 한 매미, 두 매미하는 식으로 표현한다. 즉 논배미는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하나하나의 구역을 말한다. 즉 구획진 논을 세는 단위이다. 따라서 돈매미는 의정부에 소재했던 역둔토에서 유래해서 지어진 지명이다.

돈매미를 한자로 차자(借字) 표기한 것이 둔야로서 이두표기이다. 현재의 의정부지역에 의정부(議政府)소속의 역둔토인 의정부둔(議政府屯)과 의정부평(議政府坪)이 있었다. 의정부둔에서 ()’은 군대가 주둔한 것이 아니라 농토를 의미한다.


둔배미를 한자로 본둔야(本屯夜)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것은 191441일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적에 둔야리(屯夜里)가 용현동으로 속해지게 되었으나, 이곳에 둔야면(屯夜面) 사무소가 있었으므로, 본래의 둔야라하여 본둔야(本屯夜)라고 붙여진 지명이다.

양주지역의 교통의 중심지에 설치된 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급된 전답을 역토(驛土), 지방이나 중앙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각 관청에 지급된 토지를 관둔전(官屯田)이라 하며 이를 합하여 역둔토(驛屯土)라 한다. <양주정간책(楊州井間冊>에 의하면 조선 시대 양주에는 6개의 역토와 14개의 둔토(屯土)가 있었다. <경기 각 군역 둔전답 일경 두락 결복 정도 실수 도안>(19178)<양주군 각 역 도조 실수 급 각 둔 기경 양년 조납 미납 구별 병시직 성책>, <경리원가고건>([규장각 22052)을 살펴보면 양주의 역둔토에 대한 실태를 알 수 있다.

역둔토는 역의 경비를 충당하는 역토와 역에 주둔하는 군대가 자급자족을 위하여 경작하는 둔전(屯田)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역토는 역참에 부속된 토지로, 역의 일반 경비와 소속 이원(吏員)의 봉급 및 말을 양육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일정한 부속지가 설정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관리의 숙박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하는 공수전(公須田), 행정에 쓰이는 지전(紙田), 역장의 수당에 충당하는 장전(長田) 등이 있다. 양주군에는 영서역(迎曙驛), 쌍수역(雙樹驛), 평구역(平邱驛), 벽제역(碧蹄驛), 녹양역(綠楊驛), 구곡역(仇谷驛)6개 역이 존재하였으며, 각 역마다 역토가 지급되어 경비를 충당하였다.


한편 둔토는 둔전으로서, 중앙 및 지방의 각 병영과 행정 관청의 군수 및 경비를 충당하도록 설정된 토지이며 방벌군(防伐軍)이나 인근 농민·노비 등에 의하여 경작되었고, 대부분 지주 소작제에 의거하여 경영되었다. 둔전은 원래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하여 군량을 충당하는 의미의 국둔전(國屯田)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새롭게 나타난 영문둔전(營門屯田;군문둔전)과 아문둔전(衙門屯田)은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는 관둔전(官屯田)의 성격이 강하였으며, 주로 중앙의 관청에서 설치하였다.

1427(세종 8) 각 지방 관청에 지급된 관둔전은 수령의 등급에 따라 목관(牧官)10결이었으므로 양주목도 10결의 관둔전이 지급되었다. 각 관청이 경비 부족을 호소하자 1457(세조 3)에 지급 결수를 증가시켜 양주목에 20결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5군영(五軍營)이 설립되면서 각 군영은 군자(軍資)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둔전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둔전은 지방 관청뿐만 아니라 5군영 이외의 중앙 관청에 의해서도 설치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양주에는 향둔(餉屯), 경둔(經屯), 총둔(摠屯), 훈둔(勳屯), 용둔(龍屯), 관둔(官屯), 아차산(峨嵯山), 낙천정(樂天亭), 장흥산(長興山), 천보산(天寶山), 해등촌산(海等村山), 벌리산(伐里山), 상하가오리(上下加五里) 14개의 둔토를 두어 관청 경비에 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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