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의 땅이름-45)전좌(殿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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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땅이름-45)전좌(殿座)
  • 김추윤
  • 승인 2016.10.1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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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신한대 중앙도서관장


의정부시 회룡골 입구에 전좌마을이 있다.
전좌(殿座)라는 것은 국왕의 보좌 혹은 국왕이 나와 앉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전하기로는 조선 개국 초기 왕자의 난으로 마음을 상한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돌아간 후 돌아오지 않자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환궁하게 되는데, 이때 태종이 이곳 의정부 전좌마을까지 마중 나가 상봉하게 되는데, 그 당시 임금이 좌정하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설에는 이성계가 왕이 된 후에 무학대사를 만나러 왔다가 쉬어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의정부시의 기존 지명유래인 태조 환궁설화와 관련되어 거론되는 유일한 지명이 바로 전좌마을 지명이다.
그러나 이 설화에 바탕한 지명유래는 역사성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대로 설화이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태조 대신에 왕이 된 정종은 바로 수도를 옛 고려의 수도인 개성(開城)으로 옮기고 이후 태종 8년에 다시 한양(현 서울)으로 환도하기까지 조선의 수도는 한양이 아니라 개성이었다.

정종 137일 무인조에 보면, ‘유후사(留後司)로 환도(還都)하니. 공후(公侯)는 모두 따르고, 각사(各司)에는 반씩만 따랐다. 태상왕이 거가(車駕)를 움직이니 희안군 이방간(李芳幹)과 각사의 관원 한 사람씩이 따랐는데, 길이 정릉(貞陵)을 지나니 두루 살펴보고 머뭇거리면서 또 말하기를, 처음에 한양(漢陽)으로 옮긴 것은 오로지 내 뜻만은 아니었고 나라 사람과 의논한 것이었다하고 눈물을 흘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태종 2년에 발생한 태조의 환궁사건 역시 그 무대는 당연히 개성이었다. 북쪽에 있는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상왕 이성계를 나아가 영접한다면 지리적 위치상 당연히 개성의 북쪽이어야 맞는 것이지 남쪽인 의정부는 해당이 안 된다.
따라서 전좌마을 유래와 태상왕 맞이하고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굳이 연관성을 찾는다면, 중종 317월 기록에, ‘녹양에서의 강무를 앞두고 국왕이 전좌할 곳을 간심하여 보고하였는데 전좌마을 뒷산을 전좌의 장소로 선택하고 있다는 기록이다. 따라서 강무와 관련되어 유래해서 지어진 지명이 확실하다. 그러나 중종31년의 강무는 사정 끝에 이루어지지 않아 국왕 중종이 현재의 전좌마을에 전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종중 31년의 강무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녹양평이 종종 강무장으로 쓰였기에 어느 때인가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국왕이 전좌했을 가능성도 조금은 있다.

현지지명 구전은 원래 이 마을의 원지명이 정잣머리인데, 이 이유는 원래 전좌의 앞쪽 입구에 위치하여 정잣 들머리라는 뜻이다. ‘전좌는 음운 변천상 정자로 자연스럽게 변음될 수 있기 때문에 정잣머리는 상당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아니면 옛날부터 마을에 오랫된 정자나 정자목이 있어서 유래된 지명일 수도 있다. 즉 정자목이 마을 앞에 있어서 정잣머리가 될수도 있다. 의정부에도 장암동의 정자마을, 고산동의 정자마을 등 전국적으로 정자마을 지명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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