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간도가 우리땅인 이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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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간도가 우리땅인 이유-8
  • 김현규
  • 승인 2016.08.1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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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여행작가

요서, 만주와 한반도는 우리 민족이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자 영토였다. 그러나 국가의 통합과 이민족의 침략이 반복되면서 예맥족이 중국에 흡수되고 나라의 강역이 줄어들었다. 이는 국가의 흥망에 따라 영토의 증감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중국은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주변 민족과 우리의 땅을 차지해 영토를 늘려왔다.

화하족은 황하유역에 살던 소수민족이었다. BC 5C경 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은 철기문명을 받아들여 전한, 후한, 516국 시대를 거치면서 영토를 확장해왔다. 이들은 오랑캐라 여겼던 민족에 의해 정복 받았으나 오히려 이들 민족을 흡수, 동화시켰다.


게다가 명나라 때는 원()에 힘입어 철령을 쉽게 접수하였고 청나라 때는 만주족의 정복 활동으로 신장, 티베트, 내몽고 그리고 만주의 일부를 덤으로 얻었다.

원래 명의 영토는 1616년 누르하치가 흥경(신빈)에서 후금을 건국하여 3년 뒤 명과 전투를 벌인 사르후(무순)에서 철령까지였다. 그런데 한족화 된 청나라 강희제는 정계비를 건립한 다음 송화강 동쪽 봉금지대까지 차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주와 간도의 지명(장백산, 토문강 등)을 바꾸거나 날조하기 시작한다.

요동지를 이은 명대지리서 전요지(1565)의 지도에는 송화강의 서쪽 지류인 토문강(휘발하)이 표기되어 있고 강희제 초기 간행된 청대의 성경통지초간본(1684) 지도에도 휘발하를 토문강으로 표기해 놓았다.

그런데 청러 국경조약과 정계비건립 이후 1736년 간행된 3차 본에는 휘발하(토문강) 글자를 지워버렸다. 또한 18C 후반에는 토문강과 발음이 비슷한 도문강을 새로 만들어 19C말 정계회담 때 발음상 토문=도문=두만으로 주장하는 근거를 마련해 놓았다.


이 위조한 것을 갖고 정계회담 때 중국은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억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즉 목극등의 실수로 간도가 우리 땅이 된 게 아니라 정계비 건립을 기점으로 조선이 봉금지로 헌납한 선춘령에서 두만강 이북의 땅에 대한 강탈이 시작된 것이다. 장백산(요동지에 의하면 길림성 합달령백두산), 도문강 등 지명까지 날조한 결과 중국은 인구와 영토가 늘어 오늘날 거대한 국가를 이루었다.

이렇게 차지한 땅을 지키기 위해 중국은 1962년 조·중 변계조약을 앞두고 봉황성역과 조·청 검문소였던 변문(고려문)을 없애버렸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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