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스물네 번째 이야기)간도가 우리땅인 이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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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스물네 번째 이야기)간도가 우리땅인 이유-8
  • 김현규
  • 승인 2016.07.1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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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여행작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만강국경선 옹호론자들은 6진개척 또는 정계비 건립으로 인해 우리 역사와 국경이 정해졌고 심지어 두만강 이북이 우리 영토였던 적이 없다고 지껄이고 있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와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나 지속되어 온 것이고 영토는 고정된 게 아니라 국가의 흥망에 따라 늘거나 줄어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전성기의 청나라가 1712년 강제로 세운 정계비로 우리 역사와 영토가 정해졌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


그 한 예로 문화를 보더라도 우리의 전통민요 아리랑은 여진어(언덕)에서 온 것으로 (이별한 님이 넘던) 고개길을 의미하며 도토리묵도 고서 수주적록을 통해 여진 이전부터 우리민족이 먹어 온 음식임이 밝혀졌다.

이처럼 노래와 음식도 우리 민족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나 전해져 온 것이며 한 민족의 영토는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늘거나 줄기도 한다.

그러면 여기서는 홍산문화를 이해 못한 분들을 위해 고대 유적과 유물을 토대로 간도가 예로부터 우리영토였고 중국이 간도가 그들의 땅이 아니었음을 인정한 사례를 밝히고 끝맺고자 한다.

고대 유물과 유적들은 문명과 삶의 터전 즉, 우리의 옛 영토를 말해주는 단서가 된다. 구석기 시대에 인류는 추위를 피해 의식주를 찾아 이동생활을 하였다.

BC 6000
년경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예족과 맥족은 농사를 짓게 되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우리 조상으로 예족은 요서와 만주,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 하류 두 갈래로 한반도에 들어와 강가나 해안에 모여 살며 신석기 시대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와 덧무늬 토기를 곳곳에 남겨 놓았다.

백제, 신라 초기에 예족(말갈)이 이들 국가를 침략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빗살무늬토기 출토지로 볼 때 예족은 주로 한강(암사동)이북 대방지역과 온돌시설이 출토된 함경북도 웅기 등 두만강 유역(·북 옥저)에서 한반도 동쪽 해안(동예)을 따라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일부는 부산(동삼동) 등 남쪽 해안에도 거주하였다.
맥족은 흥안령 이남 발해 만에서 요동반도와 압록강(·소수맥)에 걸쳐 살았던 종족으로 홍산 문화의 주인공이다. BC 2000년경에 접어들어 이 지역에서 청동기문명이 발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발달된 청동 무기로 곰 토템부족(맥족)의 단군 왕검이 요서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살던 예족을 통합하고(·맥조선)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고조선 건국 후 맥족은 요서, 만주와 한반도의 야산이나 구릉지에 거주하며, 청동기 시대 유물인 북방식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예족이 밀집해 살던 함경북도 두만강 유역 및 동해안 지역에서는 발견 안 됨), 미송리식 토기, 무문토기, 적석총, 석관묘 등을 남겼는데 북방식 고인돌이 분포한 한반도의 강화도에서 양구, 춘천(중도섬)까지가 맥족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 중 일부는 한강이남 한()족 지역까지 진출하였지만 백제 때 본격적으로 통합되었다.
(다음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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