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스물세 번째 이야기)간도가 우리땅인 이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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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스물세 번째 이야기)간도가 우리땅인 이유-7
  • 김현규
  • 승인 2016.06.2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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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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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을유감계 회담 때 이중하는 고지도와 정계비를 근거로 코문, 두만은 가른 강임을 제시하고간도는 토문강 이남이므로 조선의 영토라고 하였다.

그리고 2차 정해감계회담 때 청측은 홍단수를 국경 표지석을 갖다놓은 상태에서 홍단수를 철회하고 석을수를 국경으로 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이중하가 홍토수로 대응하자 진영이 칼을 빼어들고 위협하였다. 이중하 토문 감계사는 내 목을 쳐도 좋으나 나라 땅을 한 치도 내 놓을 수 없다며 맞섰다. 다시 말해 이중하는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하려는 청의 강요와 위협에 홍토수로 맞선 것이지 우리 영토가 홍토수(두만강)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다.

간도 협약 전 일본이 청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 두만강 북이 조선의 발상지(이성계의 선조)이고 조선에 내부(內附: 번호라는 명목으로 조공을 바치고 조선은 북관 개시)해 왔고 조선 유적이 많고 청국인 보다 먼저 거주했을 뿐만 아니라 거주민도 훨씬 더 많다는 근거로 간도가 조선영토라 인정한 것은 간도의 역사적 연고권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지금까지 조·명 사서를 고증해 본 결과 두만강과 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이 다른 강임이 확인되었고 발해 멸망 이후 분리된 여진족의 언어와 생활풍속, 문화가 우리와 같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 상당수가 고려, 조선에 귀화하여 문화적 공동체를 이룬 것을 봐도 간도와 만주가 우리 고토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숙종 때 목극등에게 벌벌 떨던 조선 대표와 달리 이중하는 청의 위협에 당당히 맞서 우리의 북방고토를 지켜냈다. 만약 이중하가 없었다면 간도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은 힘들었고 오늘날 연변자치주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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