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스물한 번째 이야기)간도가 우리땅인 이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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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스물한 번째 이야기)간도가 우리땅인 이유-5
  • 김현규
  • 승인 2016.06.0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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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여행작가


간도영유권의 정당성
하지만 숙종 때 신경준은 강계고에서 토문강이 두만강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용비어천가>에도 토문은 지명이며 두만강의 북쪽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시 말해 토문강은 지금 북한 지역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18km지점(17호경계비)에서 조·중 국경선과 만나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송화강과 합류하는 작은 강이다.

그런데 목극등이 분수령의 물줄기(토문강)를 두만강으로 잘못알고 경계비를 세웠고(1712) 조선인 또한 조선 초부터 있었던 토문강(土門河)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이 정계비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청이 강도회맹으로 흑산령에서 압록강 상류 수계까지였던 조선 영토를 조·청이 공동 관리하는 무인지대로 만들고 병자호란 직후 더 들어와 1638년 방압공사를 한 땅을 더 확장하여 국경을 강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곳이 그 이전에 우리 영토였음은 당빌지도가 증명해주고 있다.

조선 초 태종은 서북은 압록강으로 경계 삼았고 동북은 공험진과 선춘령까지가 조선의 영토라고 명나라에 주장하여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세종이 46진을 설치할 때 윤관의 공험진 선춘령비의 위치를 알아보라하였고 세종실록에 공험진을 동북경계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이 양성지에게 명하여 만든 동국지도에 공험진 선춘령이 표기되어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 8도 총론에서 ‘8도가 있는데 평안도는 심양과 이웃하고 함경도는 여진과 이웃하였다. 평안도 옛 경계는 압록강 너머 청석령까지로 고구려의 안시성과 백암성이 이 지역 안에 있었고 (함경도 편에서) 함경도는 곧 옥저의 옛 땅이라고 언급하여 과거 이곳이 우리 영토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 함길도 6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종성은 본래 고려 땅이었는데 빈틈을 타서 야인들이 들어와 살며 수주라고 했다. 이에 세종 16, 옛 땅을 되찾고자 이들을 정벌 또는 토지와 관직을 주어 귀화시켰다.

이들 중 농경생활에 적응 못한 여진족은 떠도는 사당패가 되었고 일부는 수렵 민족답게 도축을 하는 백정이 되었다. 16C ~ 17C 초 두만강 유역 북간도에 살던 야인 여진은 봉금령 선포 후 후금에 통합되길 거부하고 조선의 6진 지역에 들어와 살았다.

193611일자 동아일보 온성군, 회령군, 재가승부락 기사에 의하면 1935년 인구조사 때 이곳에 약 4천명의 여진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사는 마을을 재가승 마을 또는 중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남북정상 회담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김정일이 함경북도에 사는 여진족 후예들에게 한국식 성과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나라 지명에 여진어가 남아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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