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스무 번째 이야기) 간도가 우리땅인 이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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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스무 번째 이야기) 간도가 우리땅인 이유-4
  • 김현규
  • 승인 2016.05.1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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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여행작가


병자호란 이후 북방영토의 상실
현종실록 1662년 조에 영의정 정태화가 왕에게 압록강 하북의 땅을 차라리 포기하라고 아뢰자 현종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면 우리영토가 청국으로 넘어간다며 단호히 거부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패전의 결과 압록강이북의 땅이 봉금지대로 편입되었어도 완전히 청국 땅이 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689, 청은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정하였다. 레지선을 그은 다음 1711, 강희제는 관원에게 몰래 백두산을 답사케 하고 숙종 때 조·청 경계선을 정할 것을 요청해 온다. 백두산, 두만강 지역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였다.

그런데 강희제는 목극등으로 하여금 백두산 수원을 답사케 하고 압록강, 두만강 선으로 국경을 확정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17125, 청의 대표와 조선 대표가 만났는데 목극등은 조선대표인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가 6살 많다는 이유로 늙었다며 등정하지 못하게 하고 산에 올라가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다시 말해 정계비는 1683년 타이완 정복, 1689,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하고 1697, 신장위구르까지 영토를 확장한 강성기의 청이 공동관할 무인 지역인 간도와 연해주를 빼앗기 위해 세운 비라고 할 수 있다.
간도영유권의 정당성
훗날 이익은 성호사설두만쟁계에서 토문을 두만이라 하면서 고려 때 윤관이 세운 비가 선춘령(先春嶺)에 있고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지난번 국경을 정할 때 두만강의 원류만을 찾았는지(토문으로 했는지)알 수 없다고 했다.

태조 실록 41214일 자에는 여진을 오도리(목단강 지역의 토착 여진), 오랑캐(강가에서 농경 생활하는 사람), 우디캐(숲속에서 수렵생활을 하는 사람)로 구분하고 土門, 豆漫 등 여진족거주지역과 두만(만호), 맹안(천호)등 추장의 지위가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명대지리서 <요동지>에는 토문강의 근원은 장백산(길림성 합달령) 북쪽 송산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있다.

두만강 유역을 지배했던 선조 덕분에 태조 때부터 세종까지 조선은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귀화 또는 결혼을 시켜 우리 민족으로 동화시켰다. 즉 토문, 두만은 각기 다른 강 지역의 이름인데 그 중 두만은 여진족의 추장지위(만호)로도 혼용되어왔다.
비록 이익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잘못 알았지만 그는 선춘령 고려비를 경계로 국경을 정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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