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열 아홉번째 이야기)간도가 우리땅인 이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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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열 아홉번째 이야기)간도가 우리땅인 이유- 3
  • 김현규
  • 승인 2016.05.0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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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여행작가


고려사 예종조에 여진은 본디 고구려의 한 부락으로 개마고원 동쪽에 모여 살면서 공물을 바쳐 역대부터 우리의 은혜를 입어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왔다.

그런데 고려 중엽 목단강 북부의 흑수말갈(생여진)이 내려와 발해말갈(동여진, 숙여진)과 함께 고려에 침범해왔다. 이에 고려는 숙종 때 별무반, 항마군을 설치하여 1107년 예종 2년 여진족을 물리치고 북동 9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 선춘령(우스리스크 북쪽)에 고려지경비를 세워 여진과의 경계를 정하였다.

고려중기 이후엔 원나라가 고려왕을 심양왕으로 삼아 요동에 거주하는 고려인과 여진족을 다스리게 하였다. 또한 목조(이안사)에서 이자춘에 이르기까지 태조 이성계의 선조가 두만강 유역을 통치하였다. 원 말엽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공략하여 일시적으로 두만강 지역을 회복하였다.

명이 요동에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공민왕은 지용수,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을 공략케 하였다. 이성계는 1370년 우라산성(환인)과 요양을 점령하고 이곳이 원래 우리 땅임을 선포하였다.

임란전 요동에 살던 이성량이 명에 귀화하여 요동총관이 된다. 이성량이 죽자 그의 부하였던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였다. 누르하치는 임란을 틈타 해서, 야인 여진을 통일, 후금을 세운다. 1627, 청태종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강화도에서 조선과 강도회맹을 맺는다.

, 후금과 조선의 국경(변문)은 흑산령 산맥에서 압록강 상류 수계까지였다. 그런데 이 강도회맹으로 청은 패전국인 조선의 압록강 북방 영토(평안, 함경 일부) ,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함반, 봉황성, 감양, 환인, 왕천 변문선까지의 공간지대를 봉금지로 하여 조선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병자호란 전 조선이 국내성에 진을 치려했던 걸로 보아 압록강 이북은 여전히 우리 땅이었다. 병자호란 후 1638, 청태종이 봉금지대로 더 들어와 방압공사를 했는데 이때 패전국 조선의 압록강, 두만강 이북 땅이 국경선이자 봉금지대로 확정되었다.

당빌지도(1737년 제작)와 드보공디의 지도에는 조선이 상실한 압록강 이북의 봉황성이 옛 명칭 핑안(평안), 두만강 이북이 힌킹(함경)으로 표기 되어 있다. 1443년에 간행된 명대 지리서인 <요동지>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이 그 곳 거주 인구의 30%를 차지하였는데 병자호란 이후 흩어지거나 조선으로 이주하였고 1667년에는 한족의 출입도 금지시켰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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