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열 여섯번째 이야기) 간도와 백두산 답사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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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열 여섯번째 이야기) 간도와 백두산 답사기 4
  • 김현규
  • 승인 2016.03.2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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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여행작가
간도분쟁과 조·청 국경회담
우리 민족이 간도를 먼저 개척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연해주에는 1864년부터, 서간도에는 1860년대부터 이주하여 개척이 이루어졌다. 특히 서간도는 1869년 조선에서 강계군수가 평안도 행정구역에 편입하여 다스렸다.
18771878년 청나라에 기근이 들어 주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188110월 청나라는 길림성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간도를 개간하려고 하였다. 이때 청은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에 거주하고 조선의 행정력이 미친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청은 1883년 조선에 간도 귀속문제를 통보하고 조선인에게 머리를 깎고 청인의 옷을 입고 귀화하라고 하였다.
이에 조선은 1883년 월강 금지령을 해제하고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임명하여 백두산 지역을 답사하게 하였다. 어윤중은 백두산을 답사하고 정계비를 근거로 송화강 상류인 토문강(오도백하)이 경계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그는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조선인이라고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에 고종은 녹둔도에 113가구 822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아국여지도에 새겨 넣었다.
청의 간도 귀속문제가 불거지자 조선은 1885년 이중하를 토문 감계사로 임명하여 회령에서 청의 덕옥과 을유감계 담판을, 18872차 조·청 국경회담을 하였다.
이중하는 정계비를 답사하고 물줄기 옆에 설치된 토퇴, 석퇴, 목책을 확인하고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자 청나라 측은 정계비가 위조되었다’, ‘옮겨졌다는 등 변명을 늘어놓아 회담이 결렬됐다. 2차 회담 때 청은 북포태산의 삼지연에서 발원하는 홍단수를 주장하였고 이중하는 두만강 지류인 홍토수로 맞서며 한 치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이중하의 논리에 밀린 청의 덕옥과 진영이 위협하며 석을수를 강요했지만 회담은 결렬되었다.
1900년 러시아가 간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은 1902년 이범윤을 북변 간도 시찰사로 보내어 간도를 함경도 행정구역에 편입 시켜 관할하였다. 이범윤은 간도에서 500명의 사포대를 조직하여 백두산 남북 100, 동서 200리 지역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은 1908<증보문헌비고>에 서간도, 북간도편을 넣어 이곳이 고구려 발상지로 조선 고유의 영토라고 기록하였다.
대한제국의 문서에 의하면 당시 간도 주민 수는 조선인이 82900, 청은 27300명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1905년 일제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다. 1907년에는 용정에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는 조선 영토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190994일 청과 간도협약을 맺어 만주의 안동-봉천간 철도부설권을 얻는 조건으로 석을수를 경계로 하여 간도를 청에게 넘겨주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만주국 간도성은 잠깐 러시아에 의해 점령됐다. 그러다가 1949년 중공군이 들어와 만주국을 점령하고 간도성을 연변자치구로 편입하였다.
지금은 1963년 맺은 조·중 비밀변계조약에 의해 홍토수를 경계로 하여 천지는 54%를 직선으로 가르고(5·6호 경계비) 백두산 서쪽(1)에서 두만강 발원지까지 국경석을 설치해 놓았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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