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암살>을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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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암살>을 보고서
  • 제갈창수
  • 승인 2015.09.2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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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창수 경민대교수


영화 <암살>이 1200만 관객을 돌파하는 흥행에 성공했다. 진부한 스토리 전개가 아니라 친일과 독립투사를 선악의 대결로 만들면서 복선을 깔고 반전을 거듭하면서 '케이퍼 무비(범죄의 계획과 실행)'을 정교하게 꾸몄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특이한 것은 우리 사회가 종북 좌파라는 색깔 논쟁이 극심한 대립의 현실 속에서 오히려 당시의 독립 투쟁을 위한 좌우 대립의 연합을 자연스럽게 묘사했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이되어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지금까지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국회에서 1948년 반민특위위원회가 발족되어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친일반민족 행위자 처벌이 시행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파들의 방해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것은 현대사의 크나큰 오점을 남겼다.

전쟁 후 과거사 처리 사례로 "프랑스는 임시정부 합법절차를 통해서 약 767명을 처형했고 10만 명의 징역형과 시민권 박탈을 시행했고 1990년대까지 과거사 청산 작업을 지속했다.

중국 국민당 정권도 1945년부터 47년까지 369명 사형 979명 무기징역 13570명이 유기징역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친일파들을 역사적으로 청산하지 못했을까?

둘째 무명의 독립투사들에 대한 관심을 관객들이 가지게 했다.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무정부주의적인 아나키스트 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투사이다.

김원봉은 해방 후 반민특위에게 악질적인 친일경찰로 체포되었다가 이후 대한민국 경찰로 변신한 노덕술에 공산주의자로 체포 돼 고문당하는 일을 겪게 된다.

그는 이후 친일파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껴 결국 월북하고 말았다. 또 영화에서 안옥윤 캐릭터에 투영된 무장 항일 투쟁의 여성독립투사였던 여자 안중근 의사로 불리우는 남자현이다. 그는 '조선독립원'이란 혈서를 써서 조국 독립을 호소했으며 일본 장교 살해 미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하얼빈에서 객사했다.

지금은 친일 매국노들이 거의 사망한 이후이지만 해방 후 그들이 오히려 건국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재산과 명성으로 사회의 지도층의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그들 자손들도 대부분 대를 이어 사회 지도층의 각 분야에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는 반면에 목숨을 건 독립운동 투사들은 해방 후 신변에 위협과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자손들도 빈곤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과연 누가 목숨을 걸고 국가의 위기 시에 안중근 의사 유묵(遺墨)처럼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을 실천하겠는가

이 영화의 투자사가 1000만 관객 돌파를 기념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 쉼터 '나눔의 집'을 찾아 1000만원을 후원했다고 한다.

이날 전달식에 참여한 강일출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전염병에 걸려 불에 태워지기 직전, 독립군에 의해 구출돼 동굴에 숨어살다가 광복을 맞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 하다 피해를 당한 분, 우리처럼 전쟁에 끌려가 피해를 당한 사람 모두 우리 국민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망각의 역사 속에서 사는 민족은 미래가 불확실하며 비전이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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